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rA May 16. 2023

무경계: 이방인의 흔적 2

방으로의 초대

첫 장을 살짝 넘겼습니다. 갑자기 저는 광속에 휩쓸려 광활한 어딘가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그곳은 명도도, 채도도, 온도도 가늠할 수 없는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그 어떤 종류의 경계선도, 차단선도 찾을 수 없는 모호하고 광활한 공간이었습니다.  차가운 무채색이 발린 고밀도 평면 같은 그의 방에 있던 저는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색이 제각각 빛을 내고, 칸막이 하나 찾을 수 없는 뻥 뚫린 허허벌판 속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난해한 입체감에 압도당했습니다.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찍힌 수천 개의 낱개 컷들이 제 주위에서 미친듯한 속도로 되감기고 있었습니다.  그와의 연결로 제 감정이 불리해질 때면 저는 주저 없이 감정 차단기를 내렸지요. 그러면서 때론 단절의 방으로, 때론 관찰의 방으로 숨어들어 철저하게 감정의 통로를 단절시켜 버렸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이기적인 장치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만큼은  제 인생 시계가 빨리 감기가 아닌 되감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여권이 그의 시간과 제 시간을 그렇게 함께 빨리 되돌리고 있습니다. 감정과 시간의 동기화가 이뤄지는 복잡한 감정이 거세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반듯한 이마와 고집스러울 정도로 짙은 눈썹, 생기 충만한 눈과 날렵한 코, 그리고 자신감이 번져 살짝 미소를 품은 입술…


낯선 세계 곳곳에 그가 새겨놓은 찬란한 흔적을 앞다퉈 증명이라도 하듯 공백 없이 빼곡히 적힌  낯선 출입국 기록들…


이방인의 흔적이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낯선 질문들을 마주합니다. 그는 이 물리적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됐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훨씬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만의 자유를 그저 제가 읽어내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금의 모습이 이방인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번에는 숨기보다는 그의 시간을 따라가 보기로 합니다. 이방인의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상상하며 동행해보려 합니다.  닳아빠진 여권을 통해 제게 내민 소중한 초대장을 흔쾌히 수락해보려 합니다. 이방인의 흔적을 좇아보려 합니다.


이제 연결의 방에서 접속합니다.


다음 글은 5화.

(독립서점 독서관(https://www.instagram.com/dokseogwan/) 일요작가로 연재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경계: 이방인의 흔적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