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묻고 싶다. 어떻게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면서 살지?
“얘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면 병나.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게 둬요.”
이 말은 어떤 상담사나 담당 선생님이나 무당이나 목사님이 한 말이 아니다. 한의사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해준 얘기다. 혈을 짚어보고 어떤 걸 먹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아주 잠깐 이야기했을 뿐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잠시나마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내심 ‘한동안은 편하겠네'라는 생각도 했더랬다.
엄마는 늘 내게 ‘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아'라고 하셨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드물게 순종적이지 않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녀였다. 부모님이나 학교에서 ‘해야 한다'라고 일러주는 것보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크고 작은 마찰이 많았다. 다투는 건 싫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게 나에겐 더 어렵고 불편한 일이었다. 거기다 내가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다 보니 내게도 그 마찰의 시간들이 괴롭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란 사람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 했나 보다. 이러한 성향은 내가 '선택하는' 것들로 시간표를 구성할 수 있던 대학생활부터 더욱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학과 동기들이 택하는 수업과정이나 진로방향보다는 내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수강을 신청했다. 그래서 선배들이 듣는 전공수업을 끼어서 듣기도 하고, 타과 학생들 비율이 높은 교양수업을 듣기도 했다. 잘 모르는 '타인'들 속에 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관심 없는 수업을 억지로 듣는 것보다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땐 몰랐다. 이렇게 나의 주도적인 선택들로 만들어가는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하고 싶은 것만 좇아서 살아가는 것을 보며 누구는 '이기적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저밖에 모른다'며 비난을 하는 이도 있었다.
다른 건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고도, 주변의 반응이 좋지 않아도, 해내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역시 ‘그래,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건 ‘관계' 때문이었다.
다른 건 마음먹은 대로, 노력하는 만큼 원하는 결과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되려 노력하면 할수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들과는 멀어지는 걸 느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법,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잘 몰랐던 것도 같다. 그래서 말하지 않더라도 인정받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사람들의 필요를 내가 채워주고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랜 기간, 나는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도 사실 ‘타인'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해왔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내게 진로나 일은 방향을 정하거나 새로운 길을 도전하는 등,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어렵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관계가 더 어려웠다. 관계는 ‘나'만을 생각해서도, ‘타인'만을 생각해서도 결코 좋을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고, 어떤 사람들과 잘 맞고, 심지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기준이 세워져 있지 않으니까 모든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고 흔적이 남았던 것이다. 아파하던 상처가 아물어가는 시간만큼 내가 알게 된 것, 얻은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나는 관계가 어렵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건,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가 유한하다는 것이었다.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를 위한 환경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유한한 나에게 맞게 일에서도, 배우고 싶은 것들에도 우선순위를 세웠고 그 어렵던 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를 ‘환경의 최적화'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환경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 묻고 또 답을 찾아가면서. 그리고 이제 나를 향해 묻는 질문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내게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냐며, 내가 이기적이고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거, 대단해 보여. 멋지다!"라고 말이다. 참, 사람 일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