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크게 관심이 있건 없건 한 번쯤 TPO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라 예상한다. TPO는 Time, Place, Occasion를 줄인 말로 ‘경우에 맞게 의복을 착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패션업계에서 마케팅 세분화 전략에 따라 강조했고 크게 캐주얼웨어와 오피셜 웨어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 안에서도 더 세분화된 분류가 있긴 하던데 종사자가 아니라면 굳이 몰라도 관계없을 것 같다.
디자인을 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서체(타이포)’다. 앞서 TPO를 이야기한 것은 패션뿐 아니라, 서체에도 TPO 같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옷을 입을 때 고려해야 할 조건이 시간, 장소, 상황이라면 디자인에서의 서체를 사용할 때 고려해야 할 조건은 분야,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 시의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하나씩 풀어 보겠다.
서체는 외국어든 한국어든 크게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 두 가지로 분류한다. 세리프체는 글자의 일부가 꺾인 것으로, 익숙하게는 명조체나 바탕체가 이에 속한다. 주로 고전적이거나 고급스러움을 나타내고 싶을 때, 높은 가독성을 필요로 하는 인쇄물에서 많이 사용한다. 반면, 꺾임이 없는 글자를 산세리프체라고 하고 익숙하게는 고딕체와 돋움체를 떠올려보면 된다. 주로 현대적이거나 깔끔한 느낌을 나타내고 싶을 때, 그리고 웹상에서 많이 사용한다. 서체를 공부할 때 유명 회사들의 로고 디자인이 대체로 세리프체에서 산세리프체로, 복잡한 심벌이 단순하게, 좁은 영역이 넓은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알고 나서 보면 눈에 보이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는지도 모른다)
이전엔 그저 예쁘고, 독특하고, 트렌디한 서체 디자인을 가장 선호했다. 예쁘거나 써보고 싶은 문구를 새로 발견하면 일단 사서 모아놓듯, 서체도 예쁘고 트렌디한데 무료로 사용가능한 것이 있으면 일단 다운로드해서 모아두곤 했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곳마다 예쁘고 트렌디한 서체들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최근 무료로 사용가능하게 열려있는 트렌디한 서체들은 대체로 볼륨감이 있고 거기다 두껍기까지 하고 화려하다)
느끼기에 가장 트렌디하면서도 패셔너블한 서체들을 반영하는 곳은 아무래도 패션계나 방송계, 유튜브 채널이 아닐까. 자기네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인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서체들을 반영해서 방송 타이틀을 만들거나 홍보 포스터, 자막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겠다. 반면 트렌드가 어떻게 변하든 관계없이 대쪽 같은 서체를 고집하게 되는 건 문서를 많이 다루는 공공기관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증권사나 금융기관에서 발행하는 자료들도 대체로 비슷비슷한 서체를 사용한다는 것을 금세 떠올려볼 수 있다.
나는 지금껏 교육회사에서, 강의 프로그램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나 카드뉴스를 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예쁜 것보다는 높은 가독성과 지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서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이는 책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계발 도서를 주로 기획하고 출판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은 ‘잘 읽히는 것'에 우선을 두고 지금껏 눈에 익숙한 서체들 중에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된다.
나의 취향은 퍽 고정적이라 잘 변하지 않아서 여전히 귀엽고 예쁜 서체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다만 ‘예쁜 서체들을 써보고 싶다!’ ‘어울리는 디자인물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지 않을 뿐, 가끔 만드는 디자인 작업에서 이 욕구를 풀어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더 넓은 선택지를 펼쳐놓고 ‘어느 것을 고를까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나씩 맞춰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오히려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까 잘 맞는 서체와 디자인을 만났을 때 더 신이 나는 기분도 느낀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뭔가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서체만으로 디자인을 잘한 느낌이 나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하면서 지겹거나 힘들기만 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일하면서도 나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나 많은 사람들이 읽는 베스트셀러에서 읽기 좋은 서체, 자주 봤지만 잘 모르는 서체를 발견하면 사진으로 찍어 어떤 서체인지 찾아본다. 무료로 사용이 가능하면 완전 땡큐, 유료로 사용 가능한 경우라고 해도 일단 수집할 수 있으니 너무 신난다. (대표님을 잘 설득하면 책에 직접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더 좋다) 이미 많은 출판사에서 비용을 내고 쓰고 있는 서체지만 그냥 ‘자주 보던 거네'라는 생각을 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서체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기분이 다시 일하는 재미로 연결되는 게 좋다.
어디선가 디자인은 ‘조화로움'이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몰라서 엉망진창일 땐 나 개인의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했는데 점점 일을 하면서 각각의 요소가 조화로운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동안 시간만 흘려보낸 게 아닌 듯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