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럼에도 주제가 '직업'이나 '자아'와 관련된 책들은 종종 사서 읽곤 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내게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큰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왜 남들처럼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할 수 없을까? 왜 항상 만족하지 못할까? 일은 그저 일로만 생각하라는데 나는 왜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을까?'
자신에 대한 의문이 쌓이다 보니 이를 해소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라났다. 그래서 수차례 성격 검사를 하고, 관련된 강의를 찾아보다가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교양을 쌓고 학문을 넓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지독히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책이야 말로 인생의 스승이라지만, 나는 필요성을 느껴야 관심이 생기는 구조의 사람이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은 읽지는 못했다. 따라서 Input의 폭이 제한적이고, 그에 따른 Output도 제한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책들이 내게 그만큼 필요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책도 한 번만 읽어서는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책갈피를 끼우고 형광펜을 그어도 그때뿐. 시야에서 사라지면 읽었던 기억마저 희미해져 어느새 의지를 불태우며 다짐했던 내용들도 잊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읽은 책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볼 생각이다. 그 기록은 미래의 자신을 위한 보관용 기록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비슷한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누군가를 위한 글이기도 하다.
올해 들어 읽은 책들 중 어느 책을 선택할까 고민하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그동안 가져왔던 모든 내외적 갈등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을 첫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모든 것이 되는 법.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Why some of us don't have one true calling'이라는 제목의 TED 영상이었다.
대충 직역하자면 '왜 우리 중 몇몇은 단 하나의 천직을 갖지 못할까?'인데, 나는 이 제목을 발견하자마자 클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항상 속을 썩여왔던 고민이라 그 답을 너무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에밀리 와프닉은 자신의 사례를 들며 단 하나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직업, 저 직업을 떠도는 사람들이 다능인(Multipotentialite) 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강연에서 그녀는 '다능인'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들로 아래의 단어들을 소개한다.
*폴리매스(Polymath, 박식가)
여러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나 백과사전식 지식을 지닌 사람
*르네상스형 인간(Renaissance Person, 만물박사)
다양한 분야에 흥미가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
*스캐너(Scanner, 정밀 탐색가)
수많은 비전문 분야에 강렬한 호기심을 지닌 사람
위 단어들 중 자신에게 해당하는 단어를 찾았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 경우에는 위의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동시성'과 '다양성'이 한 번에 발생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TED 영상만 보았을 때는 나 자신이 '다능인'에 속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강연에서 예시로 등장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심리치료사이면서 바이올린 제작자인 사람', '잡지사의 편집장이자 삽화가이면서 기업가인 사람'처럼 동시에 여러 가지 직업을 갖는 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녀의 강연은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혔다.
그러다 몇 년쯤 흘렀을까.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녀의 TED 영상을 추천했고, 다시 동영상을 시청한 이후 그녀가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매를 결심했다.
에밀리 와프닉은 그녀의 저서『모든 것이 되는 법』에서 다능인의 행동 유형을 몇 가지 패턴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녀는 행복한 다능인들이 이들 중 한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반드시 하나만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다능인의 4가지 직업 모델
1. 그룹 허그 접근법
몇 가지 직업 영역을 오가며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면적인 일이나 사업을 하는 것.
➔ 하나의 직업에서 돈, 의미, 다양성을 모두 찾기를 원함
2. 슬래시 접근법
정기적으로 오고 갈 수 있는 두 개 이상의 파트타임이나 사업을 하는 것.
➔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직업을 가짐
3. 아인슈타인 접근법
생계를 완전히 지원하는 풀타임 일이나 사업을 하되, 부업으로 다른 열정을 추구할 만한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남기는 것.
➔ 안전성을 추구(좋은 직장이나 사업)하면서 퇴근 후 또는 주말에 여러 관심사를 즐기기를 원함
4. 피닉스 접근법
단일 분야에서 몇 달 혹은 몇 년간 일한 후, 방향을 바꿔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
➔ 많은 관심사를 갖지 않고 특정 주제에 몇 달~몇 년 간 빠져들었다가 방향을 바꿈
책에서는 각 접근법에 해당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예시를 4개씩 제시하고 그중 2개 이상 체크한 직업 모델에 주목하라고 설명한다.
내 경우, 피닉스 접근법이 성향상 가장 유사했고, 슬래시 접근법이 가장 거리가 멀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두 패턴은 다능인의 직업 모델 중 가장 상반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즐기는 것. 가끔 주변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두세 가지 이상의 취미활동을 즐기고 여러 사람들과 모임도 가지면서 심지어 부업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나는 이들이 슬래시 접근법의 사람들일 거라 생각한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체력과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반대로 피닉스 접근법의 사람들은 다른 다능인들과 다르게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면 하나에만 몰두하기를 원한다. 아인슈타인 접근법처럼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흥미를 충족해줄 수 있는 부업을 찾거나, 슬래시 접근법처럼 여러 직업을 동시에 갖는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하나의 관심사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행복을 위해 많은 다양성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지루함을 느끼게 되면 다른 몰두할 거리를 찾는 특성이 있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그동안 피닉스 접근법의 특성들을 보여왔던 것 같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날 때면 하나같이 '너는 볼 때마다 새로운 걸 하고 있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애당초 약속을 많이 잡지 않다 보니 그 기간이 최소 몇 개월에서 몇 년의 텀을 두고 있긴 하지만, 만날 때마다 직장이 달라져 있으니 신기해한다.
물론, 나의 모든 면면이 피닉스 접근법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저자인 에밀리 와프닉이 언급했듯, 한 가지 모델만이 아닌 여러 모델을 사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내 경우 피닉스 접근법이 가장 개수가 높았을 뿐 그룹 허그 접근법과 아인슈타인 접근법 또한 2개 이상 해당했다.
예를 들어, 나는 피닉스 접근법처럼 한 번에 한 가지 관심사에 몰두하곤 하지만, 그룹 허그 접근법처럼 통합적이고 다면적인 일에 끌리며, 아인슈타인 접근법처럼 보수가 좋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한다. 그 결과, 여러 차례 전직을 했어도 아예 세상에 없던 일을 창직해내거나, 위험부담이 큰 사업을 시작하는 일은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세간에서 괜찮다고 평가받는 직장으로 이직하거나 그러한 직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회가 될 때 전직을 해왔다.
그러나 직업이 안정적이라고 하더라도, '남들과 같지 않은' 성향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번에도 천직이 아니라면? 이제는 정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왜 적당히가 안되지? 일은 일로만 생각하고 살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몇 년째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스트레스를 받던 중 『모든 것이 되는 법』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도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책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읽으면서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 나간 발자취를 글로 읽으며 언젠가 저들처럼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모든 것이 되는 법』은 다능인들이 겪을 어려움들에 대해 기술하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몇몇 챕터는 벌써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을 만큼 기대한 것 이상으로 실용적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성격상의 문제점으로만 생각했던 부분이, 읽고 난 후에는 하나의 성향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거나, 견문을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아마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거나 책에 큰 가치를 느끼지 못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저자인 에밀리 와프닉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인지 알지 못해 혼란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추천한다. 만약, 당신이 다능인이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생각보다 큰 위로가 돼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