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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나무숲 Jun 11. 2023

백수는 떠나기로 했어요, 유럽으로

백수는 일이 없어서 백수 아닌가?

나는 백수인데, 왜 이렇게 일이 많지? 라는 생각에 사전에서 백수의 뜻을 찾아보았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백수란 한푼도 없는 처지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럴수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난 백수가 아닌 사람이었다. 처음 알았다. 내가 백수가 아니었다.


쿨하게 회사를 때려치고 나오면

집에서 칩거하며 빈둥댈 줄 알았는데, 사람 팔자는 어쩔 수 없는 건지.. 바쁜 나날들은 지속됐다.


작년 말부터 마음 속으로 퇴직을 다짐했지만,

회사에 퇴직을 선언한 건 한 순간이었기에 나의 퇴직은 급작스러웠다.

그래서 마지막 출근일까지 바빴고, 보통 일찍 퇴근하는 퇴직일에 초과근무를 했다.

(회사 대빵에게 인사를 하고 가야한다고 남은 거지만, 어쨌든 초과근무는 초과근무다.)


회사에 마지막으로 출근을 한 뒤로는 친구와 조촐하게 퇴사 파티를 했고,

잠깐 동안 본가에도 다녀왔다.


본가에서 돌아온 후로는 학업에 열중했다.

나는 재작년에 방송대에 학사 편입을 하여 일과 학업을 병행중이었는데,

이상하게 이번 학기에는 평일 중 출석수업이 많았다.

(방송대는 기본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과목당 한 학기에 한번의 출석수업이 있다.)

날라리 학생이긴 하지만, 착실하게 출석수업도 들었고 과제도 제출을 위해 열심히 창작했다.


그리고 면접도 나름 성실하게 보러 다녔다.

결과가 좋은 것도 있었고, 나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연락오는 데마다 착실하게 출석은 했다.


운동도 나름 하려고 했다.

하는 건 걷기와 필라테스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필라테스 수업에 결석은 하지 않았다.


사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지인들과의 약속에도 드문드문 얼굴을 비췄고, 모두들 퇴사 후 얼굴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해 뿌듯했다.


그렇게 마지막 출근을 한 후 일주일 가량이 흘렀고,

그 때 즈음 최종 면접을 본 곳으로부터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사람들과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처우 협의 과정에서 의견이 불일치했고, 결국 고사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난 취준생 모드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퇴직한 회사로부터 벗어났지만,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회사 근처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기에 물리적으로도 벗어나지 못했고,

갑작스러운 퇴직에 동료들과의 식사 약속도 계속되었기에 심적으로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대뜸 떠나고, 아니 도망치고 싶어졌다.

홀로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근데 두려웠다.

해외여행은 적지 않게 가본 편이지만, 모두 다 누군가와 함께였었기 때문이다. 혼자 가본 적은 없었다.


주변에서 얼른 떠나라고 보챘다.

런던에서, 포르투에서 한 달 살기를 했던 친구들이 런던과 포르투를 추천해왔다.

좋긴 하겠지. 하지만 무서웠다.


치앙마이 한달 살기도 문득 떠올랐다. 4월에는 화전농업 시즌이라던 동료 말이 떠올랐다. 치앙마이는 패스다.


스카이스캐너에서 대만 초특가 항공권이 보였다. 짧게 대만을 다녀올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대만은 짬 내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날 때, 회사에 안 다닐 때, 여유로울 때, 좀 더 먼 곳을 다녀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럽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마음은 정했는데, 결제를 섣불리 하지 못했다.

나 혼자 갈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망설이다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우선 본가에 잠깐 다녀왔다.

다녀오고 나서 마음을 먹었다. 결제를 하기로.


언제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날짜도 정해뒀다.

어디로 떠날 지 나라를 정한 게 아니어서 in, out을 정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스카이스캐너에서 이것저것 설정을 바꿔가면서 검색을 한 끝에

결국에는 3주간의 동유럽 여행, 프랑크푸르트 in, out으로 마음을 결정했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나는 번갯불에 콩 볶듯이 출발 일주일 전에 항공권을 끊었다.


출발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나는 2개의 회사에 서류를 지원하고, 1개의 회사의 1, 2차 면접을 해치웠으며

대략적인 나라별 체류 일정 계획을 세웠고, 숙소 예약을 해냈다.

정말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이었지만, 나름의 설렘도 존재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도 존재했다.

소매치기가 활보하는 유럽에 혼자 여행을 한다는 사실에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치기 정도의 소매치기가 나에게 접근할까봐 걱정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퇴사하고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다들 부러워했는데

한편으로는 괜히 뿌듯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걱정되어 죽는 줄 알았다.


걱정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내가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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