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홋카이도 로드트립 ep.3
일본은 근대화가 빨랐다. 1800년대 중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통일 국가가 형성됐다. 그러면서 일본엔 자본주의와 더불어 근대화 열풍이 불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배를 타고 미국과 유럽으로 향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그들은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보따리상처럼 풀어놨다. 위스키도 그 보따리 중 하나였다.
오타루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요이치라는 곳이 나온다. 그곳의 한 증류소에선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중 하나인 니카 위스키를 생산한다. 새로운 문명에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한 어느 사내의 뚝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방문했을 당시 무료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도 있었다. 10명까지 증류소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투어는 시음까지 약 70분 정도가 걸린다. 단, 일본어로만 진행된다. 외국어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단말기를 빌릴 수 있다.
정문 왼쪽엔 견학자 대기실이 있다. 증류소의 간략한 소개와 니카 위스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준다. 위스키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건조, 발효, 증류, 저장 등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하려고 밖으로 나와보니 곳곳에 홋카이도의 겨울 흔적이 강하게 묻어 있었다. 니카 위스키의 역사는 1934년부터 시작됐다. 건물의 주름살만 봐도 그 헤리티지가 짐작된다.
증류는 전통 방식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석탄을 보았다. 니카 위스키는 석탄 직화 증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화력을 조절하는 게 만만치 않다. 삽으로 불 조절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숙련된 장인이 필요하다. 이는 니카 위스키 특유의 중후한 맛과 향을 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니카 위스키의 창업자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는 스코틀랜드 롱몬(Longmorn) 증류소에서 처음으로 실습했다. 그곳의 시스템을 그대로 본떴다.
술은 어디에 어떻게 담아두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요이치 증류소에선 오크통 안쪽을 불로 한 번 태운다. 그러고 술을 담으면 나무의 향이 위스키 안으로 은은하게 스며든다. 위스키의 스모키한 맛이 이때 배어든다. 나무판 사이는 부들잎을 끼워 넣어서 통의 견고함을 더한다. 위스키가 새는 걸 막아준다. 이 모든 걸 다 수작업으로 만든다.
니카 위스키가 빚어지는 위도는 43.2도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비슷하다.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일본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지역과 비슷한 곳을 찾았다. 요이치야말로 바다가 인접해 있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한랭지의 습도와 깨끗한 물, 맑은 공기야말로 마사타카가 위스키 제조에 가장 원하는 필수 요소였다. 전문가들은 요이치의 몰트위스키에선 희미한 바다 내음이 난다고도 평한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1918년 일본에서 정통 위스키를 만들어보겠다는 부푼 꿈을 품고 홀로 스코틀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스카치위스키 증류소에서 몰트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 블렌딩 기술을 배웠다. 당시 공부한 것들을 적은 '다케쓰루 노트'는 훗날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 다케쓰루는 귀국 후 고토부키야(지금의 산토리)에 입사해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 건립을 지휘하며 본격적인 일본 위스키 시대를 열었다. 이후 1934년 요이치에 대일본과즙주식회사(지금의 요이치 증류소, '니카'라는 이름은 '日果'의 약칭에서 유래했다)를 설립해 사과로 주스를 만들어 팔면서 몰트 원액의 숙성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1940년 최초의 니카 위스키를 시장에 내놓았다.
마사타카는 스코틀랜드에서 한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연인 제시 로베르타 코완(애칭: 리타)은 마사타카의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1920년 둘은 결혼했고, 리타는 마사타카의 꿈을 위해 헌신적으로 내조했다고 전해진다. 요이치 증류소 내엔 다케쓰루 부부가 살았던 생가와 리타 하우스를 그대로 보존해 그들의 유품과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위스키는 오랜 기다림의 산물이다. 이제 막 증류된 투명한 액체는 오크통 안에서 오랫동안 영혼을 키운다. 잡내를 없애고 맛과 향에 원숙미를 더한다. 이때 중요한 게 바로 온도와 습도다. 기온이 높고 건조하면 수분 증발이 많고 숙성 속도가 빠르다. 요이치는 사계절 내내 춥거나 서늘해서 위스키를 천천히 숙성시키는 데 아주 최적이다. 창문이 없는 저장고는 여름에도 서늘한 공기로 채워져 몰트 위스키는 서서히 중후하게 익어간다.
저장소 맞은편엔 박물관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선 다케쓰루 부부의 발자취와 니카 위스키의 역사, 세계의 증류소 종류 등을 전시 중이다. 거의 니카 위스키의 홍보 전시물로 가득하다. 바에선 다양한 위스키를 유로로 맛볼 수도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2001년 영국의 <위스키 매거진>이 주최하는 위스키 테이스팅 대회에서 '싱글 카스크 요이치 10년'이 전 세계 47개 브랜드 중 최고 득점을 얻었다는 것. 일본 위스키가 세계 대회에서 1등을 한 건 이때가 최초라고 한다. 종주국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최고점이 나왔다는 점은 박수!
'디스티럴리 숍 노스랜드'라고 부르는 기념품 가게에서 다양한 한정품과 니카 위스키 제품을 살 수 있다. 이곳에서 싱글 몰트 한 병이랑 미니어처 다섯 병을 기념으로 샀다. 그런데 삿포로 시내 마트랑 신치토세 공항 면세점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시음 타임! 기념품 숍 옆에 있는 니카 회관에서 무료로 시음할 수 있었다. 도수가 높아 석 잔만으로도 충분히 알딸딸해질 수 있다. 렌터카 때문에 아쉽게도 시음은 패스하고 사진만 남겨두었다. 니카 위스키의 시음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천천히 즐겼다. 퓨어 몰트의 맛은 스카치위스키보다 순하고 향이 은은하게 남는다. 집에서 조용히 혼술 하기에 딱 좋다. 퓨어 몰트 위스키 한 병은 한 달이 채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