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와 삶에 대한 모독
최근 네덜란드 맥도날드가 공개했다가 사흘 만에 철회한 인공지능(AI) 제작 크리스마스 광고가 실패로 끝났다. 마케팅을 하다 보면 당연히 실패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단순한 마케팅 실패 사례가 아니다. 이는 현대 AI기술 사회가 직면한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를 알리는 하나의 징후다.
네덜란드 맥도날드가 공개한 '일 년 중 가장 끔찍한 시기'라는 제목을 단 45초짜리 맥도날드 광고는 지난 6일 네덜란드에서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에 벌어질 수 있는 각종 사고와 혼란을 AI 기반 영상으로 묘사한 것이다. 산타가 교통 체증에 갇히고, 선물을 가득 싣고 가던 자전거가 눈길에 미끄러지고, 캐럴을 부르는 사람들의 악보가 바람에 날아가고, 남성이 스케이트를 타다 꽈당 넘어지는 모습 등이 담겼다. 광고는 연말의 이런 복잡한 '혼란'을 피해 "내년 1월까지는 맥도날드로 피신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끝난다. 하지만 광고를 본 대중은 오히려 “성탄 분위기를 망쳤다”며 “불쾌하다”, “섬뜩하다”며 반응했다.
실제로 영상을 보면 완벽해지지 않은 실사 구현 모습이 다소 기괴한 측면이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AI가 만든 영상이 홍수처럼 쏟아지며 이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우리 일상에 가까이 왔는데, 왜 사람들은 그저 기술이 조금 부족했을 뿐인 영상에 이토록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을까? 맥도날드의 광고 공개와 그에 대한 반응, 그리고 다시 맥도날드의 답변을 따라가다 보면 ‘노동’이라는 키워드가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현대 사회가 실재(Real)보다 더 실제 같은 가짜, 즉 ‘파생실재(Hyper-reality)’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 예견했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실재가 실재가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과정, 즉 인공지능이 현실과 같은 실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하는데, 즉 원본 없는 복제품이나 인공지능이 몇 초 만에 만들어 낸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영상들을 의미한다.
과거의 예술이나 사진은 실제 누군가 창작해 놓은 원본을 모방 및 복제를 했지만, 오늘날 AI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는 원본 자체가 없다. 여기서 원본은 실재인데, 인간이 만든 창작물 그 자체를 포함하여 창작자와 그가 창작에 투입한 노동과 고뇌, 창작 과정에 투입된 시간과 재료 모두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맥도날드의 AI 광고는 원본이 없다. 광고 속에 등장하는 산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실제 배우가 연기한 것이 아니며, 눈 내리는 거리 또한 실제 장소(location)가 아니다. AI영상은 데이터의 파편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현실에 존재한 적 없으며 오직 프롬프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유령과 같은 이미지다.
이 광고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스토리가 재미가 없거나 영상미가 완성도가 떨어져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실재를 모방하려 했던 완벽한 시뮬라크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광고 영상 중에 애니메이션과 같은 실재가 아닌 영상은 수없이 많았고 누구도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만약 맥도날드 광고 영상이 AI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실재(현실)의 모방이 아닌 만화풍의 애니메이션 영상이었다면 사람들은 별문제로 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마치 카메라 앞에서 사람이 연기를 한 듯 실재를 모방했기에 거기에 기괴함을 느꼈던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우려처럼, 우리는 이미지가 현실을 가리고 대체해 버리는 단계에 살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고, 그것을 구분해 내지 못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인간의 땀과 노동, 실제 촬영 현장의 공기라는 실재성이 전혀 없는, 오로지 픽셀로만 구성된 ‘진짜를 흉내 낸 영상’이었기에 기괴하게 보였던 것이다. 맥도날드 광고는 실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파생실재가 우리에게 주는 불편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맥도날드 AI영상 문제를 보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노를 다시금 소환해 본다. 그는 지난 2017년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데모 영상을 보고 나서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해당 영상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련 프로듀서이자 드완고 AI 연구소의 CGI 팀장인 가와카미 노부오가 제작한 것으로 기괴한 움직임의 좀비 영상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AI 인공지능 기술은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미야자키가 문제 삼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고통의 생략’을 비판한 것이었다.
인간의 노동은 본질적으로 저항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오랜 시간 손에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때 오는 손의 통증, 추위 속에서 카메라와 조명과 마이크를 들고 지키는 인내, 수십 번의 NG 끝에 얻어낸 한 컷의 안도감. 이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축적되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서 생명력을 느낀다. 발터 벤야민은 1936년 발표한『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저서에서 아우라(Aura)개념으로 기술 발전이 가져올 예술의 변화를 예견했다. 그는 기술 시대에 기존 예술의 아우라 붕괴를 예고했다. 여기서 ‘아우라’의 핵심은 "그때, 그곳"에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말한다.
반 고흐가 ‘그때 그곳’에 앉아서 캔버스에 자신의 사상을 담으려 했던 그 실재가 있었기에 우리는 고흐의 작품 앞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것이다. 아우라는 신비한 빛과 같은 것이기도 하면서 어떤 사람이나 대상이 풍기는 위엄이나 존경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라가 있는 사람을,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발터 벤야민이 우려한 ‘아우라의 붕괴’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려한 ‘생명에 대한 모독’은 창작의 고통과 그 노력이라는 실재성의 제거에 대한 공통의 우려였다.
그러나 AI가 생성하는 시뮬라크르에는 이러한 고통, 즉 아우라가 없다. 프롬프트라는 명령어 입력 한 번으로 순식간에 결과물이 도출된다. 노동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네덜란드 광고가 실패한 원인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그 영상 안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타인의 고통과 노력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생산된 시뮬라크르는 결국 영혼 없는 껍데기라는 사실을 대중은 감각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번 사태는 AI 시대의 노동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어떤 이들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 우려한다. 그런 현상이 이미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질 직업 리스트가 해마다 발표된다. 맞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컨베이어 벨트가 노동자들을 해고 했듯이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로 변호사나 회계사나 기자 등이 사라질 직업 1순위라고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인공지능은 결국 사람이 하던 작업(Task)은 대체할 것이다. 자동차 조립도 사람이 아닌 로봇이 하고 있다. 사건이 수임되면 관련 법률을 검토하고 승률을 판단하는 것도 인공지능이 다 할 것이다. 복잡한 예산·결산 정리도 인공지능이 수백 배 빠르게 처리할 것이다. 기사 초안도 인공지능이 뚝딱 잡아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직업(Job)자체를 대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편집하고, 텍스트를 배열하는 기능적 행위로서의 ‘작업’은 이미 시뮬라시옹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AI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시뮬라크르를 생산해 낼 수 있다. 맥도날드 광고가 그랬고, 이미 우리는 일상에서 인공지능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뉠 것이라 한다. 인공지능(AI, AGI)을 쓸 줄 아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고. 나도 동의한다. 이제는 초등학교 이전부터 인공지능에게 묻고 작업을 지시하고 능률을 높이는 교육이 필수가 됐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산다고 해도 직업 자체가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실제로 인공지능 기술이 도입됐을 때 관련 노동은 더 고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보는 사라지는 노동력은 대체로 단순 반복 노동인 경우들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반복적으로 조립하던 일처럼 말이다. 인공지능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 의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아직 그런 일은 없다. 영상 판독기로 병명은 쉽기 진단할 수는 있어도 의사가 하루 종일 하는 업무의 80%는 영상 판독기가 판독하는 진단이 아니라 관련 부서와 전문가들과의 토론과 의사결정, 그리고 행정업무를 포함한 노동이라고 한다. 즉 직업이 작업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직업은 그 직업이 해야 하는 수많은 작업의 총합이고, 그런 작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사회적 맥락을 읽고, 윤리적 책임을 지며, 타인과 공명하는 인간 고유의 실천적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작업의 내용에 변화를 주지만 직업 자체를 소멸하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맥도날드 광고를 불편하게 본 대중들의 “실사 촬영이었다면 참여했을 배우, 합창단 등 실제 사람들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느냐" 우려에 맥도날드는 제작진은 10명이 5주간 매달렸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이 답변은 우려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한 답변이었다. 그들은 기존 노동자들이 AI라는 도구를 이용해 ‘작업’을 수행했을 뿐, 그 결과인 시뮬라크르에는 노동이 없었다. 그들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기술자에 머물렀고, 실재(Real)의 감각을 담아내지 않았기에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기괴했고 노동을 우려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 노동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이제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경쟁에서 기술과 다툴 필요가 없다. 인간은 결코 기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쏟아지는 가짜 이미지와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짜인가’를 감별하고,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 있는 사유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더 어렵고 동시적인 작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존의 작업보다 더 효율적인 일들이 새 작업이 되는 것이다. 단순 반복 노동은 기술에 맡기되, 인간은 그 결과물이 인간 존엄성에 부합하는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지 새로운 기술과 윤리를 따라 함께 진보된 노동하는 존재로 필요를 찾을 것이다.
앞으로 기술은 더욱 정교해져 실제와 구분할 수 없는 시뮬라크르를 쏟아낼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의 노동, 그 고통스럽고 비효율적인 과정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우리는 아날로그를 찾는 감정을 가진 노동하는 존재이기에 희망이 있다. AI 시대, 우리의 노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고차원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향해 진화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