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은 그저 쇼핑앱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의 물리적 토대를 지탱하는 거대한 인프라다. 우리의 아침 식탁에 오르는 우유부터 아이의 기저귀, 가전제품 등 채소와 육류, 가전제품과 가구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시장이다. 사실상 이커머스 시장을 독점하며 ‘국민 앱’의 지위에 오른 쿠팡은 이제 일개 유니콘 기업을 넘어 나스닥에 상장한 거대한 대기업이 되었다. 그런데 기업의 덩치는 공룡인데, 리더십은 파충류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이번 쿠팡 사태를 대하는 김범석 의장의 태도를 보며 드는 참담한 생각이다.
이번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의 핵심은 단순히 개인정보가 유출된 게 문제가 아니다. 정보 유출 문제는 철저히 파악해서 재발방지를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 상황에서 최고경영자가 보여주는 태도, 즉 책임의 부재가 사태를 더 크게 키운 본질이다. 김범석 의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쿠팡은 미국 기업”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 국민의 지갑을 열어 매출을 올리면서,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순간에는 미국 국적과 나스닥 상장사라는 간판 뒤에 숨어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먹튀’가 아닌가. 김범석 의장의 이러한 행태는 그가 이끄는 쿠팡이 대한민국 이커머스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대기업이 되었음에도, 그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리는 현실을 자초했다.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롤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스웨덴의 160년간 6대에 걸쳐 가족기업을 이끄는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을 보자. 발렌베리는 통신장비 기업 에릭슨(Ericsson), 방산기업 사브(SAAB), 가전 브랜드인 일렉트로룩스(Electrolux) 등 굴지의 기업을 소유하며 스웨덴 GDP의 30%에 달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웨덴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발렌베리 기업 윤리는 “존재하라, 그러나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라는 가문의 철학에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만, 이익의 80% 이상을 개인 자산이 아닌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 기업의 영속성이 사회적 신뢰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한국의 대표 재벌인 삼성 역시 이 발렌베리 가문의 시스템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려 노력해 왔다.
이재용 회장이 최근 보여주는 행보, 예컨대 아들을 군대에 보내거나 뒤에 숨지 않고 대국민 사과를 통해 국민 정서에 다가가는 노력 등은 과거 재벌 총수의 모습에서 벗어나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1978년생,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자 자수성가한 혁신가라는 김범석 의장은 어떠한가? 필자는 그를 모른다. 그가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사석에서나 관계들에서는 평범하고 어쩌면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 김범석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1의 이커머스 시장을 이끌고 있는 리더는 그저 개인이 아니다. 이번 개인 정보 유출 사태에 대청하는 김범석 의장의 모습은 기업 총수로서, 과거 재벌보다 못한 얄팍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난 국회 국정감사 증인 출석 요구에 불응했을 뿐만 아니라, 청문회도 개인 일정을 핑계로 출석하지 않았다. 국정감사 중에 한국 법인의 대표이사 자리에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앉혀 내보냈다. 국정감사는 위원들의 질의 시간은 영어로 통역하는 데에 할애됐다. 이는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를 조롱하고 국정감사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적인 꼼수였다. 유니콘 기업으로 자수성가한 젊은 창업가가 보여줄 수 있는 패기와 혁신은 온데간데없고, 법망을 피해 가려는 노회한 기술만 보여주었다.
그는 이번 사태에 국민들 앞에 나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대신, 미국 정계 로비에 자금을 쏟아 부었다. 쿠팡의 로비를 받은 미국 정치권은 한국 정부를 향해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말라”며 사실상 협박했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미국에 로비 자금을 대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국민들이 김범석 의장에게 묻고 있다. 미국 국적의 미국인이니 한국 국회에 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려면 한국 국민 앞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 국적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김범석 의장의 꼬리 자르기와 국적 뒤에 숨기는 한국 국민들에 대한 조롱이다. 로켓배송에 모든 걸 쏟아 부은 것처럼 로켓사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는 영원하지 않다. 소비자의 신뢰는 기업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자, 한순간에 증발할 수 있는 휘발성 자본이다. 발렌베리 가문이 6세대에 걸쳐 가족기업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소비자 신뢰를 핵심 자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쿠팡이 지금처럼 고객의 개인정보를 소홀히 하고, 사과 대신 기만적인 보상안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태도는 쿠팡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는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쿠팡에 필요한 것은 로켓배송의 속도가 아니라, 로켓사과의 진정성이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이는 게 이익이다. 김범석 의장은 직접 한국 국민 앞에 서야 한다. 나와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쿠팡이 재벌기업은 아니지만 누가 알겠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면 재벌기업이 문제가 되겠는가. 김범석 의장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도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고 국민을 기만할 때, 시장에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솜방망이 처벌은 제2, 제3의 김범석을 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