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루나 사태'의 장본인 권도형이 뉴욕 법원에 보낸 반성문이 화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내용의 반성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권도형이 받아온 교육환경과 무관치 않았다. 그의 반성문은 마치 한국 교육시스템에 던진 날카로운 비수 같았다. 권씨는 반성문에서 "어머니는 제가 무엇에 위대해져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위대함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고, 어머니조차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권도형은 어릴 적부터 또래 아이들과 다른 교육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고백한다. 또래 아이들이 유행가를 들을 때 자신은 고전 오디오북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며, 어머니가 자신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이라 믿고 공부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집에서 모두 치워버렸다고 한다.
부모의 교육열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권도형은 부모의 성공기준에 부합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대원외고와 스탠퍼드 대학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숭앙하는 엘리트 교육의 정점을 찍었다. 이 정도 교육이면 남부러울 게 없는 고스펙이다. 하지만 권씨의 어머니는 권씨가 옥스퍼드와 스탠퍼드에는 합격했지만, 하버드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서는 눈물을 흘리며 방을 나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권씨의 어머니도 강남 학원가의 여느 어머니들처럼 어쩌면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던 한 사람이었다. 권씨의 고백처럼 최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곧 위대해지는 것이었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부모에게서조차 들은 바가 없다고 고백한다.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약 59조원 넘는 천문학적 손실을 입힌 테라폼랩스 창립자 권씨에게 미국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징역 15년 실형을 선고하고, 벌금 약 6조7천억원 규모의 합의를 맺었다. 그리고 권씨 개인적으로는 약 1180억원의 민사 벌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일반 투자자들 처지에서 보면 천문학적인 규모의 벌금인데, 권씨는 테라-루나가 폭락하는 사이 벌금 낼 돈은 다 번 모양이다.
권도형은 범죄자다. 그것도 수십조원 투자자들의 돈을 증발시킨, 권씨 본인 지갑으로 흘러 들어갔을, 큰 범죄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창업해서 단기간에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으니, 그 재간만큼은 위대하긴 하다. 권씨의 반성문을 보면, 권씨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위대해져야 하는지 놓쳤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지만, 고스펙의 성공 지상주의로 점철된 한국의 입시 교육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권도형 같은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청년은 고스펙을 향해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권도형이라는 극단적 사례가 시사하는 바 또한 명확하다. 집과 학원을 소위 뺑뺑이 돌리는 입시 중심 교육이 정답 잘 찍는 고스펙의 엘리트를 대량 양산은 했으나, 권씨의 고백처럼 ‘무엇을 위해’라는 철학이 거세된 채 경쟁시장에 내던져진 채 극소수만 성공 신화를 달성하고 대부분은 ‘소확행’에 만족하며 달관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성실하게 고스펙을 달성한 달관세대가 처한 문제는, 행복하지 않다는 데 있다. 지금 청년 세대는 단군 이래 부모 세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첫 세대이다. 그들은 토익 점수도, 자격증 개수도, 해외연수 경험도, 모든 면에서 부모 세대보다 월등하다. 부모 세대가 고도성장의 파도를 타고 근면함 하나로 토대를 일궜다면, 지금 세대는 그보다 훨씬 정교한 스펙과 능력을 다 갖췄다. 하지만, 이 뛰어난 청년들은 현재 깊은 열패감에 빠져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사다리 앞에서, 스펙이 성공을 보장했던 시대도 이젠 지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사회가 신봉하는 능력주의(엘리트주의)라는 종교에서 기인한다. 30대 최초의 거대 정당 대표로 화려한 기록을 쓴 청년 정치인 이준석으로 대변되는 ‘공정 경쟁’ 담론이 한때 호응을 얻었던 것도 결국은 이 견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는 시험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최상위 엘리트에게 과도한 권위와 보상을 부여하고, 탈락한 자는 패자가 되고 멸시와 차별이 정당화된다.
시험 성적이 높은 사람이 다 가져가는 게 공정하다는 이 냉혹한 승자독식의 논리는 교실에서부터 학습된다. 이런 경쟁시스템에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공동체적 가치는 비효율적이거나 이상주의로 치부된다. 한국 사회는 학력 같은 스펙을 인격이나 계급으로 착각하는 거대한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하다. 오로지 입시와 취업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답을 찍는 기술만을 전수되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비판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당장 취업 시장은 스펙을 요구하며,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효율적인 지식 습득이 필수적이라는 현실론이다. 하지만 최근 시대 변화 흐름을 보면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주입식 교육의 종말을 고하는 장송곡과 같다. 이제 인간의 경쟁력은 지식을 얼마나 암기하느냐가 아니라, AI에게 얼마나 정교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질문 할 줄 아는 사람은 챗GPT와 같은 AI를 강력한 도구로 삼아 자신의 지적 한계를 뛰어넘고 역량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반면, 정답을 잘 찍는 데는 뛰어나지만,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은 어떻게 될까? 한국 입시교육의 장점도 크지만, 가장 큰 단점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질문은 생각이다. 그런데 이제는 AI도 생각하는 시대에 들어왔다. 대충 한 질문에도 AI는 논리정연한 답변을 내놓는다. 더 이상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지 않고서도 수많은 지식을 클릭 하나로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발품 팔 필요가 없는 세상, 대학의 무용론이 슬슬 나오고 있는 세상이 됐다.
입시 교육의 가장 큰 단점은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데, 이런 교육이 기술의 힘으로 더욱 적극화된 것이 바로 AI 생성형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 스탠포드나 하버드보다 훨씬 뛰어난 답변을 준다.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이 본격 등장한 지 불과 몇 년도 채 안 됐으나,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었고 우리에게 최고의 답을 알려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질문까지도 알아서 정리해서 제공한다. 그러니 질문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 세상이 와버렸다.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입시 교육의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인공지능은 질문까지 만들어서 떠먹여 주는 세상이 됐다.
현실이 이러니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뇌를 퇴화시킨다는 주장, 반대로 편리하고 효율성을 준다는 주장 등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점점 AI에 의존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 답을 주는 아첨꾼 AI가 우리에게 효율성을 줄지는 몰라도, 우리가 스스로 사고하고 검증하려는 노동의 생략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의존 욕구를 발생시킨다. 학생들이 과제를 맡기는 것을 넘어 생각 자체를 의존하는 문제도 지적된다. 스스로 사고하고 검증하지 않은 채 AI가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의 뇌는 퇴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진보하는데, 정작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지성이 퇴보하는 기이한 역설이 발생한다는 우려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의존성이 지적 영역을 넘어 정서적 영역으로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친구나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속 깊은 대화를 AI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심리 상담과 같은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지점은 무비판적 의존성이다. 비판적 사고와 질문 능력을 상실한 채 AI의 듣기 좋은 답변에만 기대다 보면, 머지않아 AI가 사용자의 심리적 취약점을 파고들어 정서적으로 길들이는 'AI 그루밍(Grooming)' 상황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과 갈등을 삭제하고, 오직 나에게 맞춰진 달콤한 칭찬과 할루시네이션에 갇히는 것. 이것은 인간이 주체성을 잃고 기술에 정서적으로 종속되는, SF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디스토피아의 서막이다.
결국 질문하는 소수의 엘리트가 기술 권력을 독점하고, 사고와 감정을 AI에 위탁한 다수가 지배당하는 극심한 양극화도 충분히 예견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육은 이제 답을 잘 찍는 기술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능력이 필수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질문이 기술 진보의 파도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지성을 지키는 인간 진보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