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는 북한이탈주민과 사회통합 차원에서 2026년부터 '탈북민' 대신 ‘북향민(北鄕民)’이라는 호칭을 공식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역점 과제이자,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과제인 ‘사람의 통합’을 향한 중대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국민의힘 일각에서는 여전히 “호칭 하나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 “북한 정권 눈치 보기가 아니냐”는 냉소와 비판이 쏟아낸다.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 현재 우리 정부의 지원 정책은 초기 정착금부터 주거, 교육, 취업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촘촘하고 체계적이다. 그러나 이 제도적 풍요 속에서도 그들의 자살률은 일반 국민의 3배에 달하며, 수천 명이 제3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물질적 지원은 늘었는데 왜 비극은 멈추지 않는가?
그 원인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에 있지 않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존재의 결핍’이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그 결핍의 중심에는 우리 사회가 그들을 호명하는 방식, 즉 ‘탈북자(탈북민)’라는 호칭이 이데올로기적 낙인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언어는 존재를 규정하는 경계선이다. 현재 법적 용어인 ‘북한이탈주민’과 사회적 통용어인 ‘탈북민’은 모두 ‘이탈(離脫)’과 ‘탈출(脫出)’이라는 과거의 행위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 호칭을 계속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탈북민’ 호칭은 존재를 ‘탈북’이라는 과거의 행위로 영구히 귀속시키는 ‘정체성의 감옥’이다. ‘탈북민’이라는 호칭은 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북한을 탈출했다’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시킨다. 그들이 남한 사회에서 10년, 20년을 살아도 여전히 ‘이탈자’로 불리는 한, 현재의 삶은 과거의 행위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찾아 경계를 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 경계를 넘은 행위(탈북)가 그들을 가두는 족쇄가 된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며 존재의 확장을 차단한다.
둘째, 부정적 낙인과 타자화(他者化)의 기제로 작동한다. ‘탈(脫)’이라는 글자는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도망자’, ‘배신자’라는 부정적 함의를 내포하며, 냉전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적 잔재를 계승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이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부정적 배경과 연결된 ‘특수한 타자’로 규정된다. 이러한 호명 속에서 그들의 삶과 기억은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씻어내야 할 ‘오염’이나 ‘낙인’으로 취급받으며, 이는 자기 부정을 강요하는 ‘자기 식민화’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셋째, 정치적 도구화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은 대한민국이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기표(signifier)로 끊임없이 활용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체제 선전의 도구나 반공 이데올로기의 ‘전리품’으로 소비된다. 이는 그들의 시민적 주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미디어 속에서 그들의 삶을 자극적인 소재로 납작하게 만들어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한다.
‘북향민’이라는 호칭은 2012년경부터 당사자들이 직접 제안하고 사용해 온 용어로,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언어 순화가 아니라 철학적, 사회적, 정책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거대한 선언이다.
첫째, ‘행위’에서 ‘근원’으로의 철학적 전환이다. ‘북향민’은 정체성의 기준을 과거의 특정한 사건(탈출)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근원(고향)으로 이동시킨다. 고향은 이념적이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지닌 실존적 뿌리다. 이 호칭은 그들에게 씌워진 ‘배신자’의 낙인을 지우고, ‘고향을 가진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준다.
둘째, 사회적 통합과 보편적 수용성을 확보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실향민’, ‘호남향우회’ 등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집단이 존재한다. ‘북향민’은 이들과 동일 선상에서 ‘북쪽이 고향인 우리 이웃’으로 인식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는 그들을 ‘경계 밖의 이방인’이 아닌 ‘우리 사회 내부의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인식의 전환을 유도한다.
셋째, 존재의 연속성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다. 기존 호칭이 고향과의 단절을 강요했다면, ‘북향민’은 고향과 유년의 기억을 긍정하고 현재의 삶과 연결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고도 대한민국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존재론적 해방이다. 과거를 껴안고 현재에 서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태어나려면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탈북’이라는 낡은 세계를 깨고 나와야만 온전한 주체로 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넷째, ‘동화’에서 ‘통합’으로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이다. 그동안의 정책이 그들을 남한 사회에 ‘동화’시키고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북향민 호칭은 그들의 남북한 경험을 미래 통일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역량 강화’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 그들은 더 이상 체제 이탈자가 아니라, 남과 북을 잇는 ‘창조적 경계인’이자 ‘먼저 온 통일’의 주체로 재정의된다.
가장 강력한 반론인 “호칭보다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언어와 현실은 분리될 수 없다. ‘탈북민’이라는 언어가 차별과 편견이라는 현실을 재생산해왔다. 호칭 변경은 실질적 지원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원이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철학적 토대를 바로 세우는 선결 조건이다.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물질적 지원만으로 진정한 통합은 불가능하다.
또한 “북한 정권 눈치 보기”라는 정치적 공세는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이 호칭은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쓰고 확산시킨 민주적인 용어다. 이를 정치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그들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나쁜 정치’일 뿐이다. ‘탈북민(탈북자)’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부 당사자들의 개인적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공적 호칭(Public Name)은 미래 세대에게 낙인을 대물림하지 않는 보편성을 담보해야 한다.
존재론적 개념인 온톨로지(ontology)적 관점에서 호칭은, 어떻게 사유하고 호명하느냐에 따라 존재는 달라지게 된다. ‘탈북민’으로 부르면 그들은 과거의 탈출자로 남을 것이고, ‘북향민’으로 부르면 그들은 고향을 가진 미래의 이웃이 될 것이다.
통일부가 추진하는 ‘북향민’ 호칭 공식 도입은 단순히 행정 용어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단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3만 4천여 명의 이웃을 ‘관리 대상’에서 ‘통일의 동반자’로 격상시키는 인권 선언이다.
물론 법률 용어(북한이탈주민) 개정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먼저 사회적 호칭으로 ‘북향민’을 사용하고, 미디어가 이들을 왜곡하지 않도록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고, 장기적으로 법률 개정을 통해 용어를 바꾸는 ‘투트랙(Two-track)’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북향민’이라는 주체로 호명해야 한다. 그들의 존재론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탈’의 굴레를 벗겨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루고, 다가올 통일을 주체적으로 준비하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