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적인 남북교류나 강경한 제재 대신, 색다른 접근법과 치밀한 전략 모색
북한 인권이란 무엇인가. 거창한 국제법적 정의나 정치적 구호를 내려놓고,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나에게 있어 북한 인권이란 북쪽에 남아있는 내 가족과 이웃, 친구들이 배불리 먹고 안전하며, 자유롭게 지역을 이동하며 사는 것, 바로 삶의 문제다. 이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이다. 일단 배가 불러야 다른 여유가 필요해진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금, 우리는 지난 윤석열 정부 시기를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정부는 대북정책의 우선순위를 북한 인권으로 천명하며 국제사회에서의 공론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는 것과 북한 주민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밖에서 외치는 인권이 안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북한이 남북 관계를 동족이 아닌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단절을 선언한 지금의 엄혹한 상황에서, 진보진영과 민주당 정부가 취해야 할 인권의 길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북한 인권을 전면에 내세워 정쟁의 도구로 삼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에게 닿을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이다.
북한 주민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생명권, 즉 먹고 사는 문제를 놓고 지난 보수정부와 과거 진보정부들의 접근법을 비교해보자. 지난 윤석열 정부와 북한인권단체들은 대북 전단이나 쌀이 담긴 페트병을 임진강에 띄워 보내는 방식을 취해왔다. 반면 과거 민주당 정부들은 개성공단 가동과 인도적 지원 같은 남북 교류 협력을 추진했다.
이 두 방식이 북한주민들의 생존권에 미친 영향을 수치로 환산한다면, 나는 감히 '100대 1'이라고 말하고 싶다. 100이 진보정부의 교류 협력이라면, 1은 지난 보수정부 시기의 방식이다. 북한주민들에게 직접 피부에 와닿는 변화를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물론 둘 다 북한 정권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조건은 동일하다.
강에 띄우는 쌀 페트병이나 풍선은 강가에 사는 주민들이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행위다. 운 좋게 줍는 누군가는 페트병에 담긴 쌀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바다로 떠내려가고 전단은 산속에 떨어진다. 이는 또 다른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더구나 북한 당국의 통제가 심한 상황에서 이를 줍는 행위 자체가 주민들에게는 체포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도박이다.
반면, 개성공단은 어떠했는가. 많게는 5~6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매일 출근하며 노동의 대가를 얻었다. 비록 임금의 상당 부분을 당국이 가져간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나머지 몫으로 가족을 부양했고, 공단에서 제공되는 식사와 간식은 그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시스템을 통해 수만 명의 밥줄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준 것과, 우연에 기대어 위험한 쌀 한 줌을 던지는 것의 효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난 윤석열 정부는 북한 인권의 일환으로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강조하며 '이산가족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도 했다. 명분은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핵심은 '만남' 그 자체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념일 제정이나 정치적 캠페인이 아니라, 죽기 전에 가족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다. 실제로 가족을 만나 그리움을 해소할 때 비로소 그들의 소원이 풀린다. 이 또한 다른 말로 인권이리고 할 수 있다.
보수진영은 과거 진보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에 대가를 지불하거나 비용을 더 부담한 것에 대해 '퍼주기' 혹은 '저자세'라 비판해왔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선한 의지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이 움직일 만한 유인책을 제공하지 않고, 당위성만 주장하며 외치는 것은 아쉽게도 복잡한 정치 현실을 무시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북한이 '두 국가론'을 내세우며 남북 관계를 부정하는 지금, 이산가족 상봉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정치적 구호보다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원칙만 고수하며 단 한 번의 상봉도 성사시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협상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더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인권이라는 가치에 부합한다.
정보 접근권 역시 중요한 인권의 척도다. 지난 정부와 일부 북한인권 단체는 대북 전단(삐라)을 통해 외부 정보를 유입시킨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접경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만 고조시키는 부작용이 크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한다고 해도 가까운 주변 이웃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정보 유입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일어난다. 개성공단이 운영되던 시절, 북한 노동자들은 남한 관리자들과 함께 일하고, 족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남조선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저들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동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교육의 장이었다. 한인 동포 사업가들이 나진경제특구나 청진시 등에 들어가 북한 주민들을 고용해서 하는 사업도 내부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방법이다. 국경이 옅어질 때 불법도 증가하는 법, 외부 콘텐츠도 남북관계가 좋으면 더 활발하게 유입된다.
전단지 한 장에 담긴 정보보다, 매일 마주하는 남한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이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과거 진보정부 시기의 활발한 인적 교류와 국경 완화는 북한 사회 내부에 남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고, 장마당 세대가 한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물론 지난 보수정부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의 공론화를 이끌어내고 북한 정권을 압박하여 인권 유린을 견제하는 기능 또한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현 이재명 정부는 달라야 한다. 북한이 두 국가론을 주장하며 장벽을 높이는 상황에서,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한다면 결국은 북한 주민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권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해서도 안 된다. 보편적 인권은 타협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권을 북한 주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지혜롭게 활용해야 한다. 진보정부의 '교류 협력'은 퍼주기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었다. 지난 보수정부의 '국제 공조'와 '원칙' 또한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 위에 유연한 개입을 동반해야 한다. 대북 전단보다는 개성공단과 같은 접촉면을 20개, 100개로 늘리는 것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기회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기회는 온다.
현실은 매우 냉혹하다. 현재 북한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 일체의 교류마저 거부하고 있다. 과거처럼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손을 내민다고 해서 그들이 반응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단순히 물자를 건네는 식의 인도적 지원이나 시혜적인 원조의 개념조차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 당국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관성적인 남북교류나 강경한 제재의 틀을 깨고, 이 견고한 단절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접근법과 치밀한 전략 모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