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우리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가장 어둡고 미숙했던 시절인가, 아니면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오늘의 삶인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게 있다. 바로 네거티브다. 보통 네거티브는 경쟁력이 약한 후보가 선두에 있는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전략으로 적극 활용된다.
요즘 6·3 지방선거에서 경선을 앞두고 자당 후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경선을 통과해야 본선 후보로 올라갈 테니, 경선에 사활을 건다. 경선이 끝나면 경쟁했던 후보들은 원팀이 되어 함께 본선을 치른다. 본선에서 타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는 전략적으로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경선에서 자당 후보들 끼리의 네거티브는 상처가 더 깊을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 나선 한 후보의 사례를 보자. 인천광역시의 한 구청장 예비후보인 전 시의원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바로 이 물음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 이 후보와 경선을 치러야 하는 경쟁 후보들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벌써 모 언론사에 4년 전에도 나왔던 과거 이력이 또 나왔다.
조금 찾아보니 이 후보에게는 39년 전, 미성년 시절 소년 보호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성인이 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구의원 두 차례, 인천시의원 한 차례, 국회의원 보좌관을 했고 1,814 시간이 넘는 봉사활동을 포함해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소년 보호 처분 사실이 선거 때마다 쟁점으로 부각되었는데도 유권자들이 반복적으로 그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는 두 번의 구의원, 한 번의 시의원으로 공직을 수행했다. 민주주의에서 유권자의 판단을 넘어서는 검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차례 민의의 심판대를 통과한 사람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소환하는 행위는 검증이라기보다 정치적 의도를 의심케 하는 반복적 공세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경감 자베르는 장발장이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시장이 되어 도시를 살려도, 그를 여전히 빵을 훔친 도둑으로만 바라보았다. 과거의 잘못으로 오늘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회복적 정의를 내팽개치고 응보적 정의로 퇴행하는 것이다. 소년법이 소년 보호 처분 기록을 전과로 남기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미성년기의 과오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 낙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처벌보다 교화를 우선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의 복귀를 돕겠다는 국가의 약속이다. 이 약속이 선거철에만 선택적으로 무시된다면, 소년법이라는 제도 자체의 존립 근거가 흔들린다.
우리 사회에는 도덕적 엄격함이라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그 엄격함이 관용의 완전한 소멸로 이어질 때, 우리가 잃는 것은 특정 개인에 대한 공정성만이 아니다. 갱생과 재기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실수 이후의 삶을 설계할 수 없게 된다. 기회란 결점이 없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 아닐 것이다. 넘어진 뒤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에게 사회가 내미는 손이어야 한다.
소년기의 한 장면으로 현재의 삶을 무화시키는 방식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 그의 파멸은 범죄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경직성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안에도 그 경직성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솔직하게 들여다볼 때다.
네거티브가 아닌 정책과 역량으로 경쟁하는 선거를 보고 싶다. 그게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