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아닌 '북향민'으로 부르자
[왜냐면] 조경일 | 작가·피스아고라 대표
현재 한국사회에는 3만4천명에 가까운 탈북민이 정착해있다. 이들을 지칭하는 법적 용어는 ‘북한을 탈출하여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북한이탈주민’이다. 줄여서 ‘탈북민’ 또는 ‘탈북자’라고 한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규정한 ‘탈북자’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용어 ‘북향민’를 제안한다.
북향민(北鄕民),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다. 왜 굳이 새로운 용어를 고집하는가. 북한을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은 모두 ‘탈북’이라는 정체성으로 호명된다. 여기서 ‘탈북’은 분단의 상징 그 자체다. 새로운 용어는 분단을 상징하는 정체성으로 호명되는 사람들의 서러움을 벗어 던지려는 가장 순화된 노력이다. 정체성으로 호명돼야 한다면 차라리 ‘북향민’이라는 용어를 쓰자. 분단과 체제대결, 이념을 넘어서는 실존 그 자체로서 차라리 호명되고 싶다는 의미다. 그저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으로 말이다.
비슷하게 호명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향민(失鄕民)들이다. 실향민은 한자 의미 그대로 ‘고향을 잃고 타향에서 지내는 백성’이다. 북쪽이 고향이었던 사람들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달리 살아온 두 국가 남과 북은 모두 각자 소속된 곳에서 터전을 닦았다. 그래서 실향민들은 돌아가도 되찾을 고향이 없다. 북쪽에 남은 가족이 있어도 실향민들의 고향은 사실상 소멸되고 기록만 남았다. 그래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 실향(失鄕)이라고 부르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반면 북향민은 여전히 그 곳에 가족들이 살고 있고 고향 땅이 각 지역에 실체로 실존한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도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북향민이 그나마 적절하다.
다시, 왜 굳이 북향민인가. 더 본질적인 문제는 ‘탈북자’라는 정체성이 한국사회에서 쉽게 정치적으로 호명되곤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양쪽 정치 진영에 의해 ‘필요에 따라’ 호출당하기 일쑤며 ‘탈북자’라는 정체성은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은 분단의 상징이자 결과물이다. 분단체제가 낳은 존재들, 조난자이자 경계인들이다. 자유인, 통일인, 통일민 등 북에서 온 이들은 저마다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도 모두 분단의 상징을 넘어서지 못했거나 먼 훗날 미래 성격을 강요하는 용어들이다. 모든 상징들은 해체해야 한다. 북향민들을 계속 ‘탈북자’로 규정하는 한 우리는 일상의 대화까지 분단에 종속되게 된다.
‘탈북자’들은 분단과 체제경쟁에서의 패자와 승자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쪽에서는 정치적으로 환영을 받으나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외부에 겉도는 사회적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남한 사람들의 마음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한국 사회는 북향민들에게 근본적인 신뢰를 주지 않는다. 물론 친절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북향민들에게는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인정투쟁과 신뢰투쟁의 과제가 놓여 있다. 약자들, 보통 주류에 서지 못한 사람들이 늘 해야 하는, 당연시되는 숙명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북향민’으로 불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북향민’으로 불리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 정체성도 부여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아무 정체성으로도 불리고 싶지 않다. 북에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정체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냥 함경도가 고향인 사람과 부산이 고향인 사람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북향민’이라 부르자고 하는 이유는 그나마 가능한 대안이 겨우 용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리는 한, 분단체제는 더욱 고착화된다. 실패한 체제에서 온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에게 곧 자신의 성공과 정당성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태어난 것에 안도감을 갖는 동시에 비교 대상이 생긴다. 그래서 북향민들은 체제 승리 선전에 앞장서도록 강요되기도 이용되기도 한다. 쉽게 비교 대상으로서의 타자로 전락하는 존재들이 바로 ‘탈북’이라는 정체성들이다.
또한 ‘탈북’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탈북민’들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그 정체성에만 머물게 강제한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은 끊임없이 대한민국이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기표로서 활용되고 있다. ‘탈북민’들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탈북’이라는 정체성에 갇힌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그렇게 호명되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은 사람들은 다시 경계를 넘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계를 허물수도 있다. 시대가 이들의 역할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