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스팔트 위에서 더위먹은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는 날이면, 드넓은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생각납니다. 바다가 보이기 전부터 코를 간질이는 짭짤한 내음새는 연푸른색으로 넘실거리는 해초들과, 그 사이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살 오른 물고기들, 그리고 그 물고기들을 갓 잡아 만든 싱싱하고 맛좋은 회와 스끼다시를 떠오르게 합니다. 초장과 와사비를 곁들인 간장 속에서 느껴지는 도톰한 활어회의 육질은 저의 혀를 춤추게 만들지요.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같은 바다라 해도 각각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강릉은 시퍼렇게 물든 파란색 바다가 시원하고, 제주도는 영화 속 외국의 휴양지처럼 에메랄드빛 얕은 바다가 아름답습니다. 을왕리는 풍부한 머드와 긴 갯벌, 그리고 즐거운 엠티를 위해 바닷속에 뛰어든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흙탕물의 조화가 똥물을 연상시킵니다. 어렸을 때는 바다를 보면 눈을 치뜬 채 발가벗고 뛰어들어가는 편을 선호했습니다만, 요즘은 모래사장에 앉아 바라보거나, 발만 살짝 담근 채로 닥터피쉬들을 유혹하는 쪽을 즐깁니다.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소금기도 생기고 모래도 들러붙는 등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영장처럼 수심이 일정해 수영하기 좋은 물도 아니고 계곡처럼 시원하고 맑지도 않으며, 강처럼 접근성이 좋지도 않은데 그 중에서 가장 보고 싶은 곳입니다. 왜일까요? 비도 좋아하고 계곡도 좋아하고 강도 좋아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중에 가장 물이 풍부한 것이 바다이니 제일 좋아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혹은 인간의 70퍼센트가 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잠깐이나마 괜찮은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옳다면 물이 95% 이상인 수박은 바다를 보면 환장할 것 같으니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수억년 전 우리의 멀고 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곳이어서가 아닐까요? 할머니댁에 가면 느끼는 그 나른하고 편안한 감정을 수천만 대 정도 거슬러 올라간 개념이 바다에서 느끼는 감정의 정체인 셈이지요. 바다는 태초의 단세포부터 뭍으로 나온 첫 번째 물고기까지, 수억년 전 인간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자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영원한 고향이니까요. 어쩌면 수천년 후, 인간이 저 별의 바다를 건너 다른 행성에 정착하고, 그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재 화성 교포 14세 같은 사람들이 장성해 지구의 흙을 밟을 때 느낄 감정이 우리가 바다에서 느끼는 감정과 사촌 격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어찌 됐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기분이 좋아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물을 보고 있으면 온갖 번뇌가 사라지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매번 다른 파도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 도대체 뭐가 중요했나 싶어집니다. 1년 내내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휴가를 즐기게 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다는 서울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직장에 매여 있는 현대인이 가진 목줄의 길이에 비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휴가철의 이름을 빌린 명절에나 찾아가는 오래된 고향입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바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그리운 바다를 느끼기 위해, 아무래도 오늘은 회를 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