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오래된 시간과 만난 나의 첫 양조장 투어






철저하게 결석 없이 수업을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발적 문제 해결과 뒤따르는 희열감이었다. 발효의 신비가 하나씩 해갈되어 가고 있을 무렵, 교육장 밖 현장까지 관심사가 뻗쳤다. 제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방구석 양조사는 분명 다른 세계일 테니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위스키 성지여행』에서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지금처럼 고생할 일이 없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술꾼이 잠자코 내민 술잔을 받아 마시면 그 자체가 소통의 시작과 끝이 아니겠는가. 술자리는 그렇다 쳐도, 생산자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의 소통이 필요하다.


술 빚는 사람은 제조법과는 별개로 본인의 술에 퍼스낼러티를 담아야 한다. 그게 어찌 쉬운 일인가. 백지에서 창조하기 어렵기에, 이미 활동하는 양조사를 직접 만나 목소리를 들어봐야 한다. 이는 교육장에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술은 효모가 만들지만, 결국 사람이 설계하고 제어해야 술이 완성된다. 난 그 사람의 역할을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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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처음’이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듣건, 평생 잊을 수 없는 첫 기록이며, 애면글면하며 고생할 시기에 초심을 찾게 되는 장면일 테니까. 첫 방문이라 뭐든지 생경하고 신기해서 어리둥절하다가도 집중력 높은 모든 감각기관의 촉수는 보고 듣는 모든 걸 흡수해버릴 것이다. 마음의 준비는 마쳤다. 문제는 생각보다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다. 혼자 찾아갈 수도 있지만, 선례를 모르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랜선 발품을 팔던 차에, 구미에 당기는 게시판의 글을 발견했다.


풀문 개더링 Full-Moon Gathering. 보름달이 뜰 때 함께 모여서 풍류를 즐기자는 취지의 모임이자 술 여행 프로젝트다. 우리술 교육기관인 수수보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여행이다. 다소 영험한 스토리텔링에 혹했고, 마침 접수 기간이 남아 있어서 냉큼 참가비를 계좌에 입금했다. 실질적 첫 양조장 여행이 시작되었다.







도착한 곳은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두들마을이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이름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모든 게 낯설었다. 나에게는 조국인데, 현재 내 던져진 여기는 외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밟지 않은 눈밭은 낯선 침입자에 의해 발자국 길이 되어갔다. 난 그렇게 내 족적을 남기며 일행과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민폐 없이 열심히 따라갔다. 1박 2일을 보낼 고풍스러운 한옥, 테이블에 차려진 산해진미와 부표처럼 놓인 한국 술이 어색하고 낯섦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와중에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왔다.


“저는 현재 퇴사하고 술 빚는 수업을 듣고 있는 신동호입니다.”
“어디서 배우세요?”
“방배동에 있는 가양주 연구소요.”


순간 뭔지 모를 백색소음이 2~3초 정도 흘렀다. 뭐지? 가장 먼저 내 소개를 하고 앉아서 다른 사람의 소개를 들었다. 몇몇 사람들 빼고는 ‘뭐 굳이 소개해야 해?’라는 뉘앙스로 본인들을 띄엄띄엄 알렸다. 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난 새로 전학 온 학생처럼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을까 봐 시선을 주도하지 못했었다. 알고 보니, 수수보리 아카데미를 다니건 아니면 관련된 사람들 혹은 풀문 개더링 행사에 자주 참여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다. 순전히 나만의 촉이지만, 텃새 아닌 텃새의 기운이 날 살짝 외롭게 했다.


야외 마당에서 구운 고기에 술잔을 부딪치다가 풍등을 날리면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몇 명과는 위장 친분을 나눌 정도로 정이 들었다. 오전에는 전통 요리를 체험하며 점심까지 마치고 마지막 일정으로 양조장을 방문했다. 첫 방문이라 설렌다고 하면 쪼랩 취급을 당할까 봐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냉정하게 ‘No 질문’을 일관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긴급 제어했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방출됐던 건, 입구 옆에 이곳을 소개하는 문구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1926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첫 대면치고는 엄청난 포스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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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세기(100년) 동안 이어온 양조장의 위엄은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가 나왔다. 양조장의 역사와 많은 시간을 동행했을 법한 양조장 대표는 서툰 인사를 끝내고 뭐 볼 거 있냐며 덤덤하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단, 발효실에는 여성들의 출입을 막았다. 여성의 기운이 들어오면 술 제조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통과 인습의 경계에서 일단 주인장의 의견을 수렴했다.


목조건물의 골격에 박물관에나 봄 직한 양조 기구들은 실제 사용한다기보다는 전시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양조장 현관문에 적힌 ‘전화 6’은 그 당시 마을에 전화가 총 10대가 있었는데, 이 양조장이 여섯 번째 설치되었다는 의미였다. 예전에는 양조장이 마을의 핵심 기관이자, 마을을 먹여 살리는 큰 밥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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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 나와 백사장과도 같은 눈밭에 양조장에서 사 온 막걸리 페트병을 꽂았다. 즉석에서 잔을 구해 자연 냉장고에서 저온 냉장된 막걸리를 따랐다. 단돈 1,000원에 3병의 가격이지만, 왠지 귀하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라벨의 주성분으로 분석하자면, 가치가 떨어지는 술일 수도 있겠지만, 현장을 보고 나온 후에는 벌컥벌컥 마시기에도 아까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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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양 양조장은 폐업 상태다. 경영 악화와 운영자분이 힘에 부치셔서 영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폐업한 이후 몇 년이 지나, 정부의 도시재생사업 프로젝트로 이 양조장을 재개장한다고 한다. 2013년 1월 이후, 수많은 양조장을 돌아다녔지만, 아직도 가장 긴 글을 쓸 수 있는 곳은 나의 첫 양조장, 영양 양조장이다.



@brewer_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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