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이 술 마셔보고 평 좀 해줘.”
2012년 9월, 내 인생의 플랜 B를 커피에 걸었다. 먹는 것보다는 마시는 데 흥미가 있어서, 그중 하나를 30대 중반부터 키워나가는 게 목표였다. 집과 가까운 이대 앞 가마빈이란 카페에서 그 꿈을 전개했고, 12월 어느 추운 날, 단골인 친구가 내게 술 한잔을 권했다.
민주는 날 형이라 부른다. 형이 편하단다. 고체 향수를 만들어 판매하는데 이화여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인이다. 일을 시작한 첫날, 내게 복숭아 향 향수를 새로 만들었다며 그 향의 평가를 물었었다. 그 이후 오늘, 잔에 담긴 술을 내밀며 평가해 달란다. 난 술을 좋아해서 자주 마시지만, 술 종류의 스펙트럼은 협소하다. 참이슬과 참이슬 클래식, 독점과도 같은 과점이다. 그런 내 앞에 놓인 술잔은 낯설었다. 연둣빛 단아한 맑은술이 도자기 잔을 붙들고 있었다. 민주는 향과 맛, 형이 느끼는 대로 말해달란다. 전문적인 용어나 평 말고 나의 느낌 말이다. 손님이 거의 나간 마감 직전이라, 온몸의 체중을 의자에 맡기고 잔을 들었다. 향과 맛을 예상할 틈도 없이 술이 빨려 들어가더니 신경세포를 서둘러 깨웠다.
“이거 무슨 술이야. 진짜 맛있다. 한잔밖에 없어?”
민주는 라벨 없는 병 하나를 꺼냈다. 같은 술로 추정되는데 겨우 두잔 나올 만큼의 양이 남았다. 한잔 더 달라기 미안할 정도. 그래도 우겨봤다. 그녀는 뚜껑을 돌려 술잔 끝까지 몽골하게 채워줬다. 마지막 잔이니 귀하게 마시라는 말도 얄밉게 들리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마셨으니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뱉어 내야 한다. 두 번째 잔을 기울여 입술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술은 향으로 마시고, 도수는 가슴으로 가늠했다. 혀는 감각이 모자란 부분을 채워준다. 허튼 향과 맛은 없고, 한곳으로 자연스레 모여 번지는 풍미. 그동안 내가 마셨던 소주는 쓰레기였다. 주량만을 내세워 마신 지난 과거는 빈 수레같은 허세였다. 거친 언어로 술의 평가를 그녀에게 전달하자, 그녀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형은 커피보다 술을 하는 게 어울려.”
커피 향으로 자욱했던 카페 안이 술향으로 채워졌다.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 굳어졌던 내 가치관에도 빈틈이 생겼다. 그녀가 짐을 챙기고 나갔다. 사장님과 카페 정리를 하면서 내 머릿 속은 한 가지로 맴돌았다. 입 안은 못내 지워지지 않은 술의 취가 남았다. 그 술이 날 흔들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15분, 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