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하이틴따위
언젠가 K-미디어에서 성형외과를 부수는 이야기를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반전을 만드는 사이다 역전극도, 포르노적인 괴담도 아닌, 그저 호쾌하게 부숴버리는 이야기가.
여덕사의 계보를 이야기하겠다며 초장부터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버리게 된 것은, K팝에 대한 사랑과 내 오랜 K-자기혐오가 함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테다. 앞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K팝의 팬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다 할 수 없는 투쟁의 연속이고, K팝은 아름다운 추억인 동시에 고통의 공범을 만드는 일이니까.
아름다운 이들을 좋아하면서도, '예쁘면 다 언니' '예쁘니까 괜찮아'라는 식의 주접 멘트가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문화가 지겨웠다. 본능적으로 별 수 없다는 무심한 너스레는, '못생긴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관계 사이의 은근한 편향을 시인하는 것만 같았다. 때로 그런 얘기를 하면 연예인은 엄격해야지, 라며 선을 긋는 이들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엄격한 기준은 미디어에 국한된게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에도 똑같이 통용되었다. 인간은 많은걸 해결했다지만, 외모에 대한 강박만큼은 때로 영원한 미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의 '포토카드 시세 높게 생긴 얼굴'이라는 표현과 같이, 그런 흐름이 무엇보다 노골적인 K팝의 궤도 아래서 2NE1의 Ugly라는 노래가 등장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이례적일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의 파장을 일으켰었는지는, 굳이 말로 다 할 필요도 없을 테다.
예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은 그만 좀 듣고싶었던 10대의 내게, 나를 위로하지 말라며 스스로가 못생겼다 내지르는 그 노래는, 그 노래를 좋아하는 것이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 쉽게 좋아한다 말할 수 없었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삶의 BGM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얼굴이 싫어 스스로를 때리던 나를 대신해 화내준 그 노래가 있어 나의 10대가 조금 더 괜찮았다고, 그런 노래가 다른 무엇도 아닌 K-팝에서 존재해주어 다행이라고 지금도 회상한다.
K팝을 좋아하는 것과 외적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이 다를까? 나이를 먹어서도 여자아이돌의 신곡을 찾아 듣고 포토카드를 모으는 어른이 되었지만, 때때로 그들의 아름다움에 열광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나기도 했다. 모니터가 꺼졌더니 오징어같은 내가 있었다는 말 마냥, 그들을 좋아할 수록 현실의 내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좋아하기를 멈출 수도 없는 모순에 매번 마음만 복잡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10년이 지나 케이팝에 (여자)아이들의 Allergy 라는 노래가 등장했을 때, 20대의 반을 거쳐가는 동안 쌓인 K팝에 대한 애증, 혹은 한국 젊은 여자로서의 삶이 스쳐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아시다시피, 그룹 아이들은 특유의 반항적인 컨셉과 자체 프로듀싱을 통해 남다른 발화성을 가지며,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했다. 그런 그들이, 소위 '잘나가는' 중산층 백인들의 하이스쿨 드라마를 모사하는 '하이틴' 컨셉을 전방위에 내걸었을 때부터,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아름답다, 혹은 '아이들이라면 반드시 반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타이틀곡 퀸카까지 등장했을 때, 첫 도입부의 가사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노래의 끝을 맞이할쯤에, 어렴풋이 K-미디어에 느끼던 나의 해묵은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었던 것 같다. 자신감의 동의어로 분홍 글리터와 '태생부터 다름'을 강조하는 이야기 사이, 아름답지 않은 주인공은 불청객인 'Ugly -Allegy' K-미디어의 세계에서, 그런 주인공을 자처하겠다는 소연의 인터뷰는 감동이기까지 했다.
물론 이 뮤비가 종국에 보여주는 '스스로가 원하는 행동'에는 너무나 명백한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일반인까지 외모 강박으로 인해 서로를 나노단위로 '컨설팅'하는 한국, 그것도 아이돌 생태계에서, 살찐 퀸카 같은 가사가 나오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물론 그들이 아이돌인 이상, 여자아이돌은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고, 여전히 포토카드는 팔릴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 아이돌로서 스스로 그런 가사를 짓고 노래하는 이들의 존재는 소중하다. 나와 또래인 그런 누군가의 고민이 K-미디어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한 시절을 조금 더 견뎌볼만한 기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며 K-POP에서까지 일부 셀링 포인트로 차용되었던 탈코르셋의 물결이 점차 조용해져 가고, 관성같은 중화의 시기가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여성성을 깨고자 젠더리스한 스타일을 추구하고, 외적 강박을 벗어나자는 신체적-심리적인 생활 양식 또한 어느정도는 생활화 되었고, 사회적 압박에 조금은 무뎌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같이 쏟아지는 외모예찬 속에 중화되고 있음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알고 있다.
지금 우리에겐 단순하게 남발되고 있는 자기긍정의 표피 따위가 아니라, 그렇게 아름답지 않고 때로 못난 나와 '너'의 참으로 솔직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아름답지 않거나, 사회에서 요구되는 일반성에서 벗어난 이들이 화면에 나오는 것이,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세상은 못생긴 여자를 미워하고, 괴담은 대체로 그 시대의 약한 존재를 신비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전히 아름답지 않은 공주 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시대에는, 성형외과에 가는 여자를 타자화하고 비난하는 성형수와 같은 괴담이 아닌, 성형외과를 부수는 활극 액션이야말로 이 K팝- 그리고 비주얼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에서 더없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