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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Feb 28. 2021

미쳐지지 않아서 쓰는 글

자의식의 글쓰기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로 한창 활동하던 때 대학을 갓 졸업한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알려져 있다. 헤아려보니 내가 선생(의 존재, 또는 작품들)을 처음 알게 된 게 90년대 후반이니 선생이 그 참혹한 일을 겪은 지 10년쯤 뒤다. ‘참척’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이 참척을 당하고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홀로 ‘토해낸’ 일기가 발표됐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는 선생의 소설만큼이나 수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걸 읽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있었지만 두려운 마음도 같이 있었다. 우울을 (지금보다 현격히) 잘 다루지 못했던 시기였고, 어떤 자극에 어떤 반응을 할지 스스로 예측하기 어려웠던 때였다. 어떤 종류의 슬픔은 안전했고 어떤 종류는 위험했는데 그 ‘어떤’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읽기를 계속 미뤘다.

미뤘다는 건 포기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언젠가는 읽을 책’ 목록에 내내 두고 살았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어떻든 나는 선생의 영향을 꽤 받은 채 청년의 초입을 지났고 그것이 내 일부를 구성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021년 2월, <한 말씀만 하소서>를 꺼내 펼친 것은 그래서 내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읽고 싶다’와 ‘읽어도 되겠다’의 틈이 (어느새) 좁아졌다는 뜻이니까. 1시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수면의 질이 바닥을 치던 어느 깊은 밤, 취한 듯 홀린 듯 그 오래된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사흘쯤 뒤에 한 번, 또 일주일쯤 뒤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서너 번을 읽으니 어떤 구절은 외울 지경이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아아,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선생의 아들이 사고로 떠난 직후 올림픽이 열렸다. 인생에서 가장 깊은 어둠에 내던져진 때에, 유례없는 국가적 도파민의 공격을 받고 선생은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했다.’ 책에는 그 ‘열정적 생각’들이 날것 그대로 뭉텅뭉텅 쏟아져 있다. 컵에 담겨야 할 음료가 카펫 같은 데에 쏟아지듯, 그야말로 쏟아져 있다. 선생이 서문에서 말했듯 “훗날 누가 읽게 될지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이다. 이런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글쓰기는 (곧든 비뚤든) 자의식에서 출발하므로 ‘어느 정도의 제정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제정신.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가장 크게 관통한 것은 그 제정신에 관한 것이었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2주 후, 딸네 집으로 거의 끌려가다시피 한 선생은 가족들의 극진한 배려와 보살핌조차 성가신, 반죽음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음식을 못 넘기고, 조금 넘기더라도 다 토해버리고, 매일 마시는 술로부터 최소한의 칼로리를 수혈받는 그런 나날들. 그 속에서 매일 밤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자신이 믿어온 신을 모욕하고, ‘자식을 잡아먹은 에미’로서의 자신을 경멸하고, 아들이 없는데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을 저주한다. 주변 사람들이 이러한 자신의 불행을 위안 삼아 본인들의 행복을 단단히 딛고 살 것에 분노한다. 사후세계를 보거나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쓴 책을 섭렵하고 그 증거에 집착한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 ‘평소의 자신 같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과 일을 하는 것’이라면 선생은 그 모든 것을 모조리 한다. 하지만 2021년의 한 독자가 그걸 명백한 ‘활자’로 보고 있다. 나중에 회고한 글이 아니라 ‘당시’에 기록된 활자를. 나는 선생의 고통 자체에 앞서, 그 지점에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선생은 미쳐야 마땅한 고통 속에서 도무지 ‘미쳐지지’ 않았다.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수시로 느꼈다. 그것이 선생을 다른 차원에서 괴롭혔다. 미쳐버리면 차라리 편할 것 같은데 미쳐지지 않고, 미쳐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식을 잃은 극한의 처지에서도) 미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에너지, 그러니까 생에 대한 ‘민망한’ 의지가 있기 때문 아닐까,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만약 내 수만 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그러나 곧 아들의 기억이 지워진 내 존재의 무의미성에 진저리를 친다. 자아(自我)란 곧 기억인 것을. 나는 아들을 잃고도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내 명료한 의식에 놀란다.”


그런 자신이 너무 징그러워서 선생은 다시 고통받는다. ‘이 와중에’ 중요한 것들, ‘이 와중에’ 지키려는 것들, ‘이 와중에’ 선택해야 하는 것들 앞에서 가슴이 두 번 찢긴다. 매일 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토하듯 일기를 쓰는데, 일기를 씀으로써 굳이 억겁 같은 하루의 고통을 낱낱이 반추하고, 반추하는 행동은 사실 하루하루의 정신상태를 점검하려는 의식 같은 게 아닐까 이내 의심한다. 이윽고 그런 자신을 혐오한다. 끔찍한 순환이다. 동시에 그야말로 끔찍하게 통렬한 자기인식이자 자기반성이다.

나는 아직 나 자신과 맞바꿀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진 않았다. 다만 ‘어떤 기억을 끊어내고 싶다’는 간절함이라면 조금 안다. 조금 안다고 말하는 건, 세상의 무한한 고통 앞에서 내 고통의 보잘것없음을 잊지 않기 위한 나의 ‘자의식’이다. 그렇다, 자의식. 결국 또 자의식이다. 자의식을 어떻게 굴리며 살 것인가의 문제.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 당시의 나는 선생만큼의 자의식을 갖지는 못했는지, 기억을 끊을 수만 있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끊을 의사가 있었다. 의학적 기술이 그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데에 분노했을 뿐. 많은 것이 달리진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고통을 부르는 어떤 기억에 대해, 굳이 연결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끊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를 나는 바라고 있다. 이게 나를 온전히 인정하거나 사랑하게 된 걸까. 모르겠다. 내가 알겠는 것은, 지금 이것 또한 내가 ‘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이 책을 언제고 또 읽게 될 듯하다. 언어를 워낙 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데다, 무엇 때문인지 미쳐지지도 않아서, 하는 수 없이 가슴을 치며 쓴 글, 비극의 시기를 어느 정도 통과한 뒤 정제해 글이 아니라 비극 한가운데서 짐승의 심정으로 쓴 글, 하지만 명백히 짐승은 쓰지 못하는 글. 그런 글이 필요한 순간이 (아예 없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이미 읽었고) 다시 찾아올 테니.


박완서 선생은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 주변의 염려와 도움 없이 일상을 꾸릴 수 있게 되고 다시 작품을 발표하며 세상에 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80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쓰는 사람, ‘그 박완서’로 살았다. 선생이 참척 당시 그토록 혐오했던, 징글징글한 자의식은 선생을 끝내 ‘그 박완서’로 살게 했다. 그 자의식은 존엄한 생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자의식이었을 것이다. 고통을 끊어 없애지 않고도 미치지 않게 하는 자의식. 내가 나인 것 자체만 중요한, 좁고 서툰 자의식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갱신하려는 자의식.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었던 날, (이 책은 읽기 전이었지만) 내게 참척이라는 단어를 알게 해준 선생이 이제야 아들 곁으로 가셨구나 싶었다. 그때도 지금도 내겐 종교가 없는데도. <한 말씀만 하소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주여 저에게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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