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
남자가 운다.
등을 돌리고.
어두운 방 안을 떠도는 흰 달빛이 남자의 넓은 등을 비춘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알몸의 남자에게서 울음이 자꾸자꾸 끓어 나온다.
어깨가 기울어지고 등뼈가 들썩인다.
남자가 아아아아, 운다.
비처럼 젖은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남자는 아아아아, 울고 또 운다.
울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내가 본 대로 묘사하고 싶어서 나는 방금 열 줄 넘게 썼다. 쓰고 지운 것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써도 내가 본 것에 닿지 못하는 걸 나는 받아들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는 남자의 등에서 삶의 너무 많은 비밀이 새어 나오고 있는데. 그 비밀을 나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어 누가 좀 나누어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 영화 <애프터썬>을 직접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저 남자의 우는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부추기며. 영상매체에 대한 산문의 열패감을 살짝 감추고.
튀르키예로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남자, 이름은 캘럼. 서른한 살. 얼마 전까지 카페를 운영했지만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 중이다. 중저가 리조트로 보이는 휴가지에 명상과 태극권 관련 책을 가지고 왔다. 틈날 때마다 수련 동작을 한다. 그 모습을 놀리는 열한 살 딸, 소피가 함께 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소피는 엄마와 살고 있으므로 둘만의 휴가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둘은 남매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소피는 꽤 신이 나 보인다. 이 모든 장면은 캠코더에 촬영된 저화질 영상과 소피의 기억에 담긴 과거다. 소피는 현재 성인이고, 파트너와 함께 갓난아이를 기른다.
나는 방금 또 열 줄 정도로, 영화의 거의 전부를 말했다. <애프터썬>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정보는 이게 다다. 우는 남자의 뒷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삶의 너무 많은 비밀은? 그냥 그 가운데 어디에 있다. 튀르키예의 찬란한 태양빛, 발코니 난간에 걸어놓은 젖은 옷가지와 수영복, 소피의 어깨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캘럼의 손, 리조트에 놀러 온 청년들의 음담과 스킨십을 모른 체하며 호기심을 키워가는 소피의 눈빛, 그 사이 어딘가에. 여름휴가는 그저 평범하게 흘러가는데 소피가 잠시 비운 호텔방에 혼자 있던 캘럼이 운다. 등을 돌리고. 어두운 방 안을 떠도는 흰 달빛이... 캘럼의 넓은 등을 비춘다.
갑자기 왜? 혹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휴가에 특별한 문제는 없다. 소피는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아이다.(도대체 이런 배우는 어디에서 데려오는가) 아빠가 준비한 여행이 다소 허술해도 아빠와 “같은 태양”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 즐겁다. 수시로 캠코더를 들이밀고 익살을 부리는 천진함과,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는 사려 깊은 마음을 다 갖고 있다. 함께 살지 않는 부녀의 여행에 끼어드는 긴장감이 없지 않으므로 소피도 캘럼도 간혹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긴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불안정한 바이오리듬이 일으키는 약간의 흔들림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캘럼은 운다. 소피가 없는 밤에, 아아아아. 그것은 더는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의 울음이다.
더는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터지는 울음. 영화는 많은 것을 생략하지만, 그 울음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튀르키예의 눈부신 태양으로도 데워지지 않는 마음의 빙하 같은 것. 명상으로도 태극권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젊음의 현기증 같은 것. 너무 많이 남아 곤란한 삶 같은 것. 쏟아지는 삶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목격하는 초라함 같은 것.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같은 태양” 아래 있는 것.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바닷가의 사람들과 미리 귓속말로 약속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그 다정함에 저항할 수 없는 것. 삶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과 지탱하고 싶은 마음의 무게가 결국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을 만큼 똑같아서, 호텔방 발코니의 난간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그중에서 어른이 된 소피의 기억에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조차 영화는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한 사람이 혼자 울던 밤을,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아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것을 누구는 성장이라 부르던가. 또 누구는 삶이라 부르던가.
캠코더에 남아 있는 마지막 화면. 배경은 공항이다. 캘럼은 엄마에게로 돌아가는 소피를 배웅한다. 환하게 웃으며 손 흔드는 소피. 소피가 사라질 때까지 캠코더를 놓지 않는 캘럼. 소피가 떠나고 캘럼은 사방이 하얗게 칠해진 다소 비현실적인 공간을 지나 문을 열고 사라진다. ‘영화적으로는’ 딸과의 여행을 마친 그가 곧이어 삶이라는 여행을 마쳤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는 연출이다. 그 장면을 위한 이른바 빌드업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그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슬픈 결말이기 때문에. 더는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터지는 울음을, 나는 이제 울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