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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대영 Jun 19. 2019

조경이야기 #5

이십여 년 전 설계사무실 초년병 시절, 내가 할 수 있던 일은 선배들의 트레이싱 페이퍼 설계도 뒷면에  먹을 넣는 게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캐드 명령어 polyline으로 봉합하고 solid를 채워서 녹지공간과 시설지를 구분하는 게 손쉬운 일이지만 당시엔 연필심을 곱게 갈고 모은 뒤 휴지에 묻혀 고르게 발라줘야 하는 극도로 정교하고 시간을 요하는, 설계실 초짜들에겐 시간 죽이기 최고의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삑사리가 나거나 균일한 농도를 맞추지 못해 얼룩이라도 생기면 날아오는 선배들의 가르침은 무지막지했다. 먹을 먹이는 작업을 하면서 유심히 본 평면설계도에는 늘 지렁이처럼 생긴 점선들이 녹지공간에 있었고 그 앞엔 경관석이라는 이름의 돌덩어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점선들은 흙을 쌓는 모양과 높이를 알려주는 마운딩이라는 이름의 설계기법이었고 웬만한 당시 설계도면들에는 어김없이 이런 계획들이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을 답사하면 그 형태와 기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엔 ‘당연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몸에 익히게 되었다.


최근 경기도 인근에 작은 모델 정원을 만들면서 시설물을 앉히기 위한 터파기와 나무 심을 웅덩이를 파내면서 생긴 엄청난 양의 봉긋이 쌓아진 흙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고 초년병 시절 보았던 그 마운딩 설계안들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저 많은 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한숨과 함께. 흙이라는 재료가 흔해서 쉽게 생각되지만 그 처리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단위 비중이 돌의 무게와 비슷하여 몹시 무거운 재료이며 쉽게 흘러내려서 쌓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면적도 많이 차지한다. 물론 쌓으면 많은 장점이 있다. 이미 단단하게 다짐된 공사장의 지반 위에 성토를 하게 되니 아무래도 흙의 구조가 알알이 부스러져 식물들에게 좋은 통기와 보습의 환경을 제공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경사면은 경관적으로 단조로운 풍경에 풍성한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선배들은 이렇게 많은 양의 사토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면서 흙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선형의 경관들을 상상하고 작업했던 것일까? 아니면 늘 하던 관성으로 그렸던 것일까?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중력 안에서 곧추 선 것들은 당연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시공간의 압축으로 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고 외국의 좋은 디자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조경가 조지 하그리브스( http://www.hargreaves.com)는 흙을 예민한 각도로 마치 무 썰 듯이 작업한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이해하고 바라보면 좋겠지만 우선 시각적으로 새로운 모습이라는 생각에 너 나 할 것 없이 따라 한다. 최근 국내에 소개되는 작업들에도 이런 형태의 디자인이 한 둘은 보인다. 베껴 썼다기보다 나름의 개념을 가지고 작업한 것이리라 믿고 싶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조형은 이미 우리 곁에 친근하다. 산을 깎아서 만든 우리네 고속도로의 흔한 풍경이지 않은가. 이런 절토면을 보고 누구도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유명한 작가의 흙을 쌓아놓은 작업은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둘 다 같은 소재를 사용하고 비슷한 형태를 보이지만 하나는 흙의 모양을 조형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디자인의 과정으로 승화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흙을 잘라서 다른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기능의 행위라서?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그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작가의 흙 모양은 내겐 그저 단순한 절토면과 다를 바 없다. 흙이 가지는 물성의 느낌을 인간의 의지로 이겨 내려는 안간힘만 느껴진다. 그의 작업을 폄하해서가 아니고 단지 보이는 모양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모양을 만들려면 수고스러운 일이 한 둘이 아니다. 쉽게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쌓아야 하고 에지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보형물 디테일이 따라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흙이 가지는 안식각을 고려하고 넓게 깔아서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해야 했을까. 그냥 흙 일 뿐이지 않는가.

자연스럽게 쌓아서 편안한 녹색의 경관을 만들고 있지만 건축의 구조미와 비견해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흙이 가지고 있는 물성의 느낌 그대로 구축해도 된다.

십여 년 전 주상복합건축의 조경설계를 했다. 피터 워커의 디자인을 대놓고 도용해서 작업했다. 그 작품집에 있는 이미지를 사례 사진이랍시고 스캔하여 보고자료에도 첨부했다. 동그랗게 쌓을 흙무더기를 입구 주변에 그려 넣고 '입구 상징 조형 마운딩'이라고 이름 붙였다. 예술작품이 될 예감이었기에 자신 있게 시행사 대표에게 브리핑을 했다.  느닷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왜 입구에다 공동묘지를 만들었냐?... 음...

언덕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언덕. 흙이 흘러내려도 괜찮을 것이다. 곧추 세울 필요 없이 흙이 가지는 물성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학교를 설계하고 있다. 경계를 따라 담장이 둘러쳐져 있어 내부에서 보이는 경관을 위해 담을 일부 가려야 하는 상황이다. 린 시절 보았던 선배들의 도면들을 떠 올렸다. 그렇게 할 생각이다. 내부의 흙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자연스럽게 쌓아둘 것이며 조형은 우리 아이들이 등하교를 하면서 매일 같이 보게 되는 먼 산들이 만드는 중첩의 실루엣을 닮은 그런 형태를 만들 것이다. 잠시 바깥에서 쉬는 시간 바라볼 때 가장 편안한 모습의 조형을 만들어 갈 것이다. 안식각을 충분히 두어서 쉽게 허물어지지 않게 할 것이며 정면으로는 관목의 식재를 배제하고 후면에 배치해서 땅의 실루엣이 보이도록 할 것이다. 장비를 써서 쉽게 작업할 수 있게 하고 어차피 인위의 작업이지만 표현의 의지를 절제해서 흙이 생긴 모양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계획할 것이다. 새롭고 날 선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 가치가 퇴색되어가는 것들을 바깥으로 다시 꺼내 놓는 일 또한 의미를 가진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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