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고 더 이룰 것이 없는 세상

[호구] 1부 10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팀장님. 안녕하세요.
제가 퇴사한 지 19일이 지났습니다.
여태 회사 상황이 정리되고 있지 않다고 하니
속상한 마음이 듭니다.
요청하신 세부 문서를 보내드리오니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퇴사할 당시에 내 반려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에서 보냈다. 무언가를 쓰다가 한숨을 내쉬다가 두 눈을 감다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기척을 내면 그때서야 책상 아래에 있는 나를 보고 딱딱한 얼굴을 고쳤다.



"사리사욕으로 벌인 일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다쳤고 멈추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끼는 동료들과 밥벌이가 되어준 회사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을 감사팀에 알리고 퇴사를 감행한 이유는 회사가 더는 병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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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의 만행을 눈감는 다른 상사들이 한때는 미웠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살 충동 항목에 '매우 그렇다'라고 동그라미를 그리는 제 자신을 보면서 더 빨리 멈추지 못한 제가 더 비겁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빨랐어야 했습니다. 모두 제 탓이니 팀장님께서는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최선의 상황으로 여기고 팀장님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



따로 인쇄한 종이를 반으로 두 번 접고 산책가방의 주머니에 찔러 넣은 후 인간은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열 걸음에 한 번씩 오줌을 지리다니 아무래도 내가 이상하다. 옆의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일 때문에 위염이 심해진 건진 배를 자주 움켜쥐고 상체를 반으로 접었다. 여자가 동물 병원을 검색하는 동안 나 또한 인간을 열렬하게 살폈다. 불규칙한 근무 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든 시간의 경계를 지워 놓았고, 딱 붙는 유니폼과 구두는 몸에 긴장을 깊숙이 박아 놓았다. 섬에 와서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여실히 깨달았다.



여자는 초등학교 운동장 정중앙에 등을 깔고 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배 위에 나를 올렸다. 그런 다음 회사에 보낼 문서를 가방에서 꺼내어 한 줄 한 줄 눈으로 읽다가 이번 일로 '사라진 것들과 생긴 것들'을 떠올렸다. 직장, 월급, 건강, 빚이 풍선에 담겨서 하나둘 오르다가 팡팡 터졌다. 그리고 시간, 낮은 운동화, 위장병 그리고 이름 모를 떠돌이 개가 풍선줄에 매달려서 대롱거렸다. (나 말고 개가 한 마리 늘었다는 뜻이다).





바닷가 마을을 방랑하던 개였다. 어느 날 심하게 다쳐서 여자 앞에 나타났고, 치료가 필요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들개여서 혼자 힘으로는 구조할 수가 없었다. 구조대에 신고했고 동물센터로 데려갔다. 센터에서 임시보호 절차를 마치고 집으로 데려와서 회복에만 집중했지만 이후에는 대책이 없었다. 소형견에 익숙한 여자에게 들개는 너무 크고 산만했다. 살리고 싶은데 물릴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살리지 못할까 봐 더 무서웠다.



'강아지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막막하던 때에 메시지가 왔다. 여자보다 먼저 퇴사한 동료였다.






회사 사람에게 질린 여자는 새로운 관계에 무심했다. 그가 다가와도 누구를 막을 힘도 당길 힘도 남지 않아서 마음 밖에 아무렇게나 두었다.



작은 개에게 결석과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동물병원에서 알게 되었다. 몹시도 울었다. 임시보호 기간이 끝나고 들개를 입양했다. 들개에게는 산책과 목욕 등 인간과 하는 모든 일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불편한 개와 서툰 인간이 매일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개들에게 절절매지 않는 그가 다.



한낮. 한라산 고원에 있는 1100 고지에 올랐다. 여자에게 일어난 일을 남자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해넘이가 시작되고,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도 가만히 들었다. 달 뜬 하늘에 서로의 생각이 끝없이 이어져 새벽녘 아주 기다란 별자리가 되었다. 은은한 위로였다.



아픈 개와 야생마와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개를 데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바닷가 목장을 달렸다. 오름을 오르는 날에는 가파른 언덕에서 개들보다 먼저 숨이 끊어질 듯했다. 내일을 바라지 않고 숨찬 시간들을 덤덤하게 누렸다.






계절이 바뀌고 작은 개의 상태가 나아졌다. 큰 개는 사람과 지내는 삶에 전보다 적응했다. 딱 맞는 유니폼과 구두와 스타킹 등 10년 동안 속박 당한 것들에서 벗어나자 여자의 건강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넉넉한 식사 시간과 생리 현상을 자유로이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처럼 심신이 사뿐해졌다.



안정이 깃들자 두 인간에게 둘만의 시간이라는 것이 생겼다.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여행하는 곳'으로 모처럼 섬을 누볐다. 어느 날 이름 모를 동네에서 처음 발견한 집을 보고 동시에 반했다. 하루는 그 집에 찾아가서 담벼락에 턱을 괴고 서 있거나 어느 날에는 해변의 텐트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한 해가 지나고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남자의 손을 붙잡고 정상에 오른 순간, 평평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었다. 시선을 던지기만 하면 둘의 것이 되었다. 다 이루었고 더 이룰 것이 없는 아주 하얗고 배부른 세상......



그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랬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아플수록 집밖으로 나가라고, 걷지 말고 달리라고 남자가 소리쳤어요. 털색도 다르고 덩치도 나보다 큰 놈을 갑자기 내 동생이라고 하지를 않나,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박자 맞춰서 걔랑 날뛰다 보니까 거짓말처럼 결석도 컥컥 대던 기침도 사라지대요. 이제는 달리려고요. 아픈 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라 기꺼이 빠지면 건널 수 있는 구덩이일지도 모르니까요. 진흙 좀 튀었다고 성질내지 말고요, 목욕은 당신의 일이 되겠지만 우리 이대로 뛰어요!
아주 하얗고 배부른 세상





[호구] 1부 끝.
2부에서 이어집니다.






*[호구]는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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