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5분의 환상과 8시간 50분의 고역

[호구] 1부 9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동이 트기도 전에 산자락에 모인 인파를 보면서 내 반려인간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을 오르겠다고 했었다. 목적지는 한라산 꼭대기. 대책은 없고 의지만 충만한 이 인간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몰라서 꼭두새벽에 여자가 집을 나간 후에도 나는 현관에서 한참 눈을 못 뗐다. 산을 좋아하지만 그뿐, 동네 언덕배기도 힘겹게 오르면서 어찌 이런 무모한 도전을 자처한 것일까. '짠! 여기는 한라산 정상, 백록담입니다. 잘 다녀왔어요.',라는 식의 거뜬한 산행 후기가 오늘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하나 골로 보내게 생겼다.



"백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날씨네!"



"전국 산악회들 오늘 다 모였네!"



목청 좋은 산악인들이 앞뒤에서 감탄을 끝없이 터뜨렸다. 대설이 내린 후였다. 여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상고대를 헤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15분. 숨이 턱까지 찬다.



'하산할까?'



정신은 맑은데 한 줄 서기로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쫓겨 몸이 바쁘다. 앞 뒤 간격을 유지하면서 박자를 지키려고 걸음에만 집중한다.



출발한 지 2시간. 남은 길이 여태 오른 길만큼 남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현실을 부정한다.



'내가 날 잘못 본 거야. 하산할까?'



설산이 회색으로 변하고 발바닥에 통증이 찾아온다.



출발한 지 4시간. 두 발의 조절 능력을 잃고 대피소에서 완전히 주저앉는다. (당시, 대피소 매점이 운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올랐다가 적게 챙겨 온 마실 물이 바닥난다.)



'사인이 목마름이라니.'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최후와 눈을 파먹고 되살아나는 자신의 미래를 동시에 본다.



출발한 지 5시간. 정상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뭉개지고, 눈과 구름을 딛고 선 세상은 발아래 흐른다. 투명하게 얼어 있는 백록담의 담수는 마실 수만 있다면 신이 될 것 같다. 몽롱한 기운에 취한 지 5분, 백록담 둘레의 울타리에는 발 둘 곳이 없고 인증숏을 찍는 인파의 소음에 귀가 먹먹하다. 이어 하산하라는 관리자의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터져 나온다.



'어느 세월에 내려가지?'





하산한 지 20분. 가파른 내리막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오직 앞을 본다.



'내가 구르든, 네가 구르든 혼자 죽지는 않겠구나.'



하산한 지 1시간. 갈증은 심해지고 가도 가도 같은 색의 풍경이 허연 블랙홀처럼 빙글빙글 돈다.



'눈을 밟고 있는 이 발이 내 발인지 네 발인지 모르겠어.'



하산한 지 2시간. 기분은 도착, 인데 현실은 반이 남았다.



'무릎을 기준으로 허벅지와 종아리가 분리되었나 봐.'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전후방의 인간들 틈에서 영혼 없이 발질을 계속한다. 이때부터 인간의 걸음을 포기하고 사지를 불규칙하게 휘저으며 새로운 걸음을 창조한다. 그러자 얼굴에 가신 핏기와 잃었던 웃음이 살짝 돌아와서 실성한 인간처럼 실실거린다.



물 좀 주세요~



해괴망측한 얼굴을 하고 물을 동냥한다. 하산하던 남자가 길을 멈추고 가방에서 자신의 생명수를 내어준다.



'땅을 밟으면 세상에 꼭 이로운 인간이 되어야지.'



꿀떡꿀떡 목을 적시는 동안 앞지르기하는 인간들이 음악소리를 쩌렁쩌렁 내며 발 없는 귀신처럼 여자의 앞으로 미끄러진다.



하산한 지 4시간. 출발한 새벽녘과 도착한 저녁녘이 까맣게 닮았다. 살아서 도착했다. 설산의 정기를 받았으니 뭔가 충만한 감정이 오를 것 같은데 그 기분은 다음 주쯤 올 것 같다.






한라산 대설 소식이 뉴스에도 나왔다며 동료들이 여자에게 산행 소감을 묻는다.



"너무 힘들었는데...... 너무 힘들었어. 건강을 해쳤다고나 할까."



거대한 설산과 건강한 몸을 바꾸었다. 3일 동안은 직립보행이 어려워서 일하기가 어려웠다. 굉장한 소원을 이루고도 좋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팔다리가 점점 제 기능을 찾으면서 몸 안에 이상한 기운이 돌았다.



일종의 신비로움, 같은 것이었다.






오르내리는 길은 무료했고, 정상에서 누린 환희는 너무 짧았다. 사는 일 같았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나날.



산처럼 사람에게 뛰어들었다. 뛰어들었으니까 출발했고, 계속 걸으면 그들에게 도착할 줄 알았다. 무턱대고 산을 오르내린 일처럼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와도 무사한 산행이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함께인데도 함께할 수 없는 괴로움뿐이었다. 끝도 없이 고통을 삼키던 어느 날 섬에 들어왔다. 짐정리를 마치자마자 산을 올랐다. 그리고 등산스틱과 하나되어 구부러지지 않는 뻣뻣한 두 발을 질질 끌면서 산을 내려올 때 다짐했다.



그것은, 단 5분의 환상과 8시간 50분의 고역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이를 곁에 두고 다시 산을 오르겠다는 기도와 약속이었다. (지금보다 체력이 좋아지면 고역의 시간은 줄고 환상의 순간은 늘겠지.)






그리고 3년 후. 섬에 세 번째 겨울이 왔다.



산을 오른 지 3시간 30분째. 여자는 자신을 향해 뻗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나머지 세 발로 데크를 오르며 정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그 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서 얼마나 반가웠다고요. 좋은 꿈은 이루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 나은 꿈으로 부푼대요. 먼지만 한 눈송이가 사람만 한 눈사람이 되어서 기쁨을 주는 것처럼요. 그런데 요즘 나는 아침마다 기침이 나오고, 의지와 상관없이 오줌을 지려요. 나도 더 늙기 전에 산을 오르고 싶어요.
신비로움 같은 것






*[호구]는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작가의 새 글은 <구독&좋아요&댓글> '3종 세트'로 태어납니다. :)

이전 08화당신이 나빴다고 외칠 수 있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