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빴다고 외칠 수 있는 순간

[호구] 1부 8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난 너랑 한 것도 연애라고 생각해.



하다 하다 내 반려인간의 연애는 '폴리아모리'의 세계까지 뻗어나갔다.

*폴리아모리(polyamory)

:정적·성적으로 끌리는 여러 명의 대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경우 혹은 그러한 사랑의 형태를 일컫는 말로 다자연애라고도 한다.



이것도 사랑, 저것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남자(상사)의 얼굴은 몹시도 진지했다. 여자의 손등으로 떨어지는 남자의 눈물은 심지어 무결하기까지 했다. 이상한 놈을 피해 섬으로 왔더니 더한 놈과 2년 반을 알고 지낸 것이다. 한 사람과의 연애도 벅찬 마당에 '다자연애'라니. 스스로 고리타분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도, 이런 새 시대적인 발상은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나도 정말 미안해. 이번 생은 한 번에 한 놈만 사랑하련다.'






여자는 상사에게 거리를 두었고, 후임에게는 전처럼 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임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적어도 사무실에는 폴리아모리의 기운이 사라졌고, 여자는 마음을 꼭꼭 닫고 회사생활을 이어갔다.

사장의 언어폭력과 감정 횡포는 나날이 심해졌다. 여자에게는 더 갉아먹힐 영혼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때즘 회사에 얼쩡거리는 들개 한 마리가 손님과 직원에게 음식을 구걸했다. 누군가는 음식으로 누군가는 발길질로 개에게 답했다. 자신이 섬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처럼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루 치의 밥을 벌기 위한 삶이라니......'



사랑이 풍만한 상사는 여자의 진심을 농락하고도 잘 지냈고, 사장은 직원들을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썼다. 모두가 부당하다고 욕했지만 오직 수군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사장의 뒤에서 늘어놓는 무능력, 분노장애, 무개념 등의 비난이 사장의 앞에서는 예! 하나로 돌변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 출근 준비를 일찍 마치고 해수욕장으로 갔다. 장대비가 퍼붓는 새벽이었다. 차창문이 깨어질 만큼 통곡을 했다. 부당한 상황과 상처 주는 인간들에게 여태 뱉지 못한 감정들이 높은 파도에 칭칭 감겨서 자신을 덮쳤다.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지금뿐이었다.






며칠 보이지 않던 들개가 회사에 다시 나타났다. 상처투성이에 빼빼 마른 몰골로 절뚝거리며 구걸을 했다. 언제나처럼 하루치의 밥을 위해서. 여자는 전과 달랐다. 더 이상 하루치의 밥만 벌자고 괴로움을 견디어 가며 뒤에서는 불평과 험담을 앞에서는 거짓 충성을 늘어놓지 않았다.



자신과 회사에 해로운 인간에게 반드시 벌이 닿게 하려고 움직였다. 그것이 자신을 먹고살게 해 준 회사와 그동안 믿고 따라준 동료를 위하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의 본사 감사실에 사건이 알려지고, 감사실 직원이 섬으로 급파되면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

당한 날보다 당한 이후의 날들이 더한 고통이었다. 여자는 회사를 나왔다. 가을에 시작한 조사는 해를 넘겼고, 여자는 정신과를 찾았다. 회사를 나올 때에는 들개와 함께였다.



사장은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여자에게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가, 남은 직원들 앞에서 여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욕을 해댔다. 직속 상사였던 남자는 철저하게 여자의 연락을 피했고, 여자를 따르던 동료들은 은근히 여자를 멀리했다. 스스로의 개입에 따라 회사에서 각자의 처지가 달라질 일이므로 당연했다.

사장의 형편없는 평판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본사 측에서 사장의 해고 처리를 바라고 있다는 뜻을 여자에게 조심히 내비쳤다. 이대로라면 사장에게 미미한 처분이 내려질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여자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바랐다('요구'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사장이 분노와 욕을 쏟아낼 때 내가 녹음이나 촬영 버튼을 누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빴다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지금뿐이었다. 가해 정황을 밤새 문서로 정리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고,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장소에서 사장의 거짓진술과 증인을 확보했다.

감사실에 마지막으로 사건 보고서가 들어가는 날,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동료들 중 두 사람의 증언이 더해져 사장의 처벌에 힘이 실렸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비겁하지 않았다.'






그해 봄, 사장이 시골 계열사의 말단 직원으로 좌천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다자연애를 즐기던 상사는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섬을 떠났다는 소식이 여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2년 후. 모처럼 섬을 떠나서 서울에 있던 날이었다. 약속이 있는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지하철 역 근처의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빈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주문을 하고 앉을 곳을 보다가 겨우 빈자리를 확인하고 가방을 놓았다. 주문한 햄버거를 들고 자리에 앉아서 폰 배터리를 충전하려고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테이블 아래 콘센트를 확인하는데 옆 테이블의 남자가 두 군데를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려고 여자가 몸을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건 2년 반 전의 상사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섬을 떠났다는 건 알았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여자가 남자에게 충전기를 흔들어 보였다.



"아, 네, (콘센트) 쓰시려고요?"



정중하게 말하던 남자의 얼굴이 굳고......

여자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남자의 테이블에 '무시'의 벌을 올려두고 깥으로 나오자 마침내 여자의 괴로움이 그쳤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요즘은 몇 명과 연애해요?라고 물어보지 그랬어요. 당신과 함께한 이후로 당신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해였어요. 비겁하지 않았잖아요, 그럼 된 거예요.
"당신들이 나빴다."






*[호구]는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작가의 새 글은 <구독&좋아요&댓글> '3종 세트'로 태어납니다. :)

이전 07화눈으로는 패고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