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뒷바라지를 마치고 이혼남에게 뒤통수를 맞더니 내 반려인간은 이어서 결혼, 이라는 것을 했다. 6년의 결혼생활이 이혼,에 환장한 남편 덕분에 끝나고 인간에게는 달랑 개 한 마리만 남았다. 네 발 달린 짐승을 데리고 어디로 가서, 무얼 하며 먹고살아야 하는지 인간은 나를 데리고 적잖이 고민을 했다. 머릿속에 지도를 띄우고 태어난 곳부터 대학생활, 직장생활, 연애를 했던 지역을 순서대로 색칠을 했다. 그러자 고향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이 모두 칠해졌다.
여자가 갈 곳은 '섬'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도 되는 땅. 비행기에서 내리면 지난날의 자신을 자신조차 몰라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처음 만난 섬은 구름에 튀긴 공갈빵 같았다. 여자가 살면서 본 가장 '비현실적인 하양'이었다. 현관문을 열 때도 걸어서 출퇴근을 할 때도 허연 대낮에도 심지어 꺼먼 새벽에도 거대한 뭉게구름이 세상을 뭉텅이로 감싸고 있었다. 걷고 숨 쉬는 모든 현실이 구름 속에서 일어나는 하루였다.
섬생활에 막 안정이 들 때 직장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잠든 척하던 불안이 벌떡 일어나서 여자를 괴롭혔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춥고 배고프면 백 배는 더 서러울 거야.'
밀린 월급을 결국 받지 못하고 한겨울 해수욕장에서 구걸을 하는 자신과 개를 떠올렸다. 창밖에는 한창 눈이 퍼붓고 있었다.
'새벽 출근길이 험난하겠구나.'
불안을 구경하지 말고 내일은 눈처럼 눌러 밟고 지나가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새로 구한 직장에서는 월급이 또박또박 나왔다. 불안은 사라졌고 밖의 눈도 모두 녹았다. 동백은 지고 유채꽃과 벚꽃이 만발했다. 먹고사는 고충은 여전했지만 스트레스가 쌓이는 속도보다 풀리는 속도가 빨랐다. 그리고 입사 때부터 여자를 유난히 챙기는 직장 상사가 있었다.
뭍에서 사망했던 여자의 연애세포는 쉽게 되살아나지 않았다. 남자(상사)는 여자의 취향에 맞게 사무실을 꾸몄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으로 사무실 캐비닛을 빼곡히 채웠다. 여자가 좋아할 음악을 들려주려고 LP플레이어를 직접 들고 출근을 했다. 어느덧 사무실은 여자의 집보다 아늑해졌다.
여자가 도움을 청하면 집으로 달려왔고, 쉬는 날에는 섬을 한 바퀴 통으로 돌았다.해안도로로 원을 그린 다음, 산을 타고 중앙을 가로질러 내려왔다. 이른 아침에 나선 길이 한밤중이 되어도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마음이 꿈틀거렸다. 여자는 지난날의 호구 연애들을 억지로 흔들어깨웠다. 살아난 기억들이다행히 마음의 불씨를 꺼뜨렸다.
여자가 어떻든, 남자는 여자가 살고 있는 섬에 충실하게 '환상'을 날랐다. 산을 올라서 차를 마시고, 바다를 보다가 노래를 듣고, 책을 읽다가 노을을 보는 식이었다. 영혼이 마비되었고, 여자는 더 이상 힘들었던 지난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 여자에게는 몹시도 아끼는 후임이 있었다. 여자는 미소와 배려가 장착된 그녀에게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과거의 여자는 살기 위해 웃었었다. 한 방울의 웃음에 백 배는 많은 눈물이 담겼다는 사실 즉,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행복은 물을 탄 가짜 술과 다름없었다.
후임이 자신의 힘든 가정사를 여자에게 꺼내면서 둘은 친밀해졌다. 비밀이 없어졌다. 모든 감정을 나누고 회사 안팎에서 서로를 돌보았다. 직장 동료와 상생하면서 인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음에 서로 놀랐다.
이때쯤 여자가 상사에게 고백을 했다. 남자는 주저했다. 자신은 모자란 상대라며 여자에게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혼자 계신다느니, 조카에게 자폐가 있다느니... 구구절절한 가정사를 늘어놓으며 어렵게 거절했다. 여자는 남자의 답을 받아들였고, 둘은 전과 다름없이 지냈다.
후임이 근무한 지 1년이 지나고 그녀와 단둘이 근무를 서는 날이었다. 일하는 내내 후임의 행동이 보통 때와 달랐다. 할 말이 있다고 표현은 하는데 어쩐지 심하게 망설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라면 항문을 짜주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 상태로 저녁이 왔다. 알 것도 같은데 듣기는 싫고 들어야 끝날 것 같은 밤이었다. 퇴근을 목전에 두고 마침내 후임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OO님(상사)이랑 식사를 했는데 저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단둘이 밥을 먹는 사이였다고?'
강아지가 찔끔할 것으로 예상했던 설사는 생각보다 스케일이 컸다. 그녀가 싸지르는 똥을 그대로 얼굴로 받아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네 생각도 같아?"
"......."
같지 않다면, 지금처럼 몸을 베베 꼬고 앉아서 세상 착한 얼굴로 가만히 입을 닫고 있지는 않겠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긴 정적이 지나서야 후임이 연신 내뱉는 말이 여자의 귀에는 '병신아, 병신아~'로 꽂혔다.
여자는 상사와 후임 모두와 친밀했다. 상사는 여자와 후임 사이의 모든 일을, 후임은 여자와 상사 사이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눈으로는 후임을 패고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했다. 힘든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맙다고. 여자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호구가 맞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여자가 상사를 앉혔다.
"OO(후임)이랑 연애하려고 했어?"
후임에게 고백한 사실을 여자가 알고 있다는 것에 남자는 충격을 받았다.
"걔(후임)한테는 안 모자란 사람인가 봐?"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비참해진다.'
"자기보다 열일곱 살 어린애랑 뭘 할 생각인데? 먹고, 자고, 그다음 계획은 있나?"
'말을 할수록 나는 등신이 된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지? 난 뭐가 돼!"
'나이에 밀려서 네가 한방 먹은 거잖아.'
마음은 말을 말자, 고 하는데 입이 말을 듣지 않고 여자를 부채질했다. 그러다 침묵으로 버티던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부여잡고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연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뒤이은 남자의 말에 여자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난 너랑 한 것도 연애라고 생각해."
'skfe1;guf-d+ssl18d;k!!!'
이래서 욕을 끊을 수가 없다. 두성으로 쏘아 내린 욕지거리가 가슴에 가득 차고서야 여자는 주먹을 풀었다.
차라리 그냥 썸이었다거나 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라는 식의 어처구니없기만 한 느낌이 아니었다. 정신병에 걸린 걸까. 증세를 검색하면 병명이 나올 것만 같았, 아니 나와야만 지금 이 상황에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회사 사장의 언어폭력과 감정횡포로 2년째 시달리는 중이었다. 차라리 1차원적인 공격성 발언이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울먹이는 남자를 눈으로는 내팽개치고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다.
"난 괜찮아. 둘만 생각해."
환성의 섬은 환멸의 섬이 되었고,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호구였던 것이 분명했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호구연애에도 차원이 있나 봐요. 상사도 후임도 날 참 귀여워했는데 그럼 그 인간들이랑 나랑 한 것도 연애였겠어요. 남자의 입장은 '연애는 했지만 연인은 아니었고, 연인은 아니었지만 사랑은 싸질렀다' 이런 거죠. 섬을 떠나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이민뿐. 저 둘의 목에다가 내 뾰족한 송곳니를 당장 꽂아버릴 테니까 아직은 섬을 떠나지 말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