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타운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까지, 흑인 음악의 진화 (1960년대 중반)
1.여전히 존재했던 사실상의 차별
1964년 7월 2일, 워싱턴 D.C.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에 서명했다. 이듬해에는 투표권법이 통과되었다. 법적으로 인종 차별은 위헌이 되었고, 한 세기 가까이 미국 남부를 지배하던 짐 크로우 체제는 마침내 공식적인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 사회가 오랜 비폭력 투쟁과 피땀으로 일궈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게 폭발했다.
1964년 여름 뉴욕 할렘,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와츠 지구, 1967년 디트로이트. 북부와 서부 대도시에서 대규모 흑인 봉기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특히 1967년 디트로이트 봉기는 5일간 지속되며 43명의 사망자를 냈고, 주방위군과 공수부대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워 도심에 진입하는 내전 양상을 띠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남부의 '법적 차별'은 철폐되었지만, 북부 대도시에 뿌리 내린 '사실상의 차별'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드라이닝으로 상징되는 금융권의 구조적 주거 분리, 흑인 거주지를 관통하며 세워진 고속도로, 백인 경찰의 일상적인 폭력 등 법은 이 모든 것 앞에서 무기력했다. 정치와 법이 끝내 닿지 못하는 흑인 대중의 분노와 좌절 속으로 음악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2. 모타운의 경제학: 포디즘에서 탄생한 '젋은 미국의 소리'
포드, GM, 크라이슬러의 거대한 조립 라인이 돌아가는 자동차 산업의 수도. 베리 고디(Berry Gordy)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의 성공방식을 그대로 음악 산업에 이식했다. 1959년, 가족 상호신용조합에서 빌린 800달러. 그것이 '모타운 레코드(Motown Records)'의 시작이었다. 고디는 흑인 특유의 역동적인 리듬 앤 블루스에 클래식 현악기와 세련된 팝 멜로디를 입혀, 백인 중산층 가정의 라디오에서도 거부감 없이 흘러나오도록 정교하게 '가공'했다. 전속 작곡가들이 히트곡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하우스 밴드 '펑크 브라더스'가 일관된 사운드를 입혔다. 아티스트들은 걸음걸이, 인터뷰 답변, 심지어 식사 예절까지 백인 주류 사회의 기준에 맞춰 철저하게 훈련받았다.
슬로건은 "젊은 미국의 소리"였다. 여기서 겨냥한 대상은 인종을 초월한, 강력한 구매력을 지닌 베이비붐 세대 전체였다. 슈프림스(The Supremes),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음악은 차트를 점령했다.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모타운의 세련된 팝이 흑인 음악의 날카로운 정치적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냈다는 것이었다. 또한 코튼 클럽 시대처럼 흑인의 창조성이 백인 시장의 취향에 종속되는 구조가 반복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한 것은 모타운의 엄연한 역사적 성취였다.
3. 샘 쿡의 각성: 뼈아픈 성찰
모타운이 상업적 통합을 이루어내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 아티스트들의 날카로운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1963년, 크로스오버 팝 스타 샘 쿡은 한 장의 레코드를 듣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잘생긴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미 백인 시장까지 장악했던 그였다. 그를 뒤흔든 것은 다름 아닌 백인 청년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였다. 흑인의 고난과 인권 의식을 당사자가 아닌 백인 포크 가수가 대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쿡에게 거대한 부채감이 되었다.
그 치열한 성찰의 결과물이 1964년 발표된 "A Change Is Gonna Come"이었다. 달콤한 팝의 언어로 포장되지 않은, 차별 속을 살아온 흑인의 날것 같은 고통과 희망이 웅장한 오케스트라 위에 얹어졌다. 이 곡은 발표된 뒤 민권 운동의 영적인 주제가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샘 쿡은 이 곡을 세상에 내놓은 지 불과 몇 달 뒤, 33세의 나이에 모텔 총격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 노래는 오래 남아, 흑인 대중음악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역사적 증언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온 세상에 증명했다.
4. 가스펠에서 소울로: 교회 밖으로 나온 굿 뉴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흑인 사회의 정치적 지형은 급격히 이동하고 있었다. 비폭력 통합주의에서 말콤 X가 주장한 급진적 흑인 민족주의로, '우리도 받아들여 달라'는 호소에서 '블랙 파워'라는 선언으로. 백인 사회에 편입되기를 구걸하는 대신, 흑인 고유의 정체성과 존엄을 당당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온전히 담아낸 그릇이 바로 '소울(Soul)' 음악이었다.
소울의 뿌리는 노예제 시대부터 흑인들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공동체 공간, 흑인 교회에 있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교회 안의 가스펠이 지닌 즉흥적 감정의 분출, '콜 앤드 리스폰스'구조, 신체 전체로 뿜어내는 리듬감을 세속의 무대 위로 끌고 나왔다. 땀을 흘리며 무대에 쓰러졌다가 스태프가 어깨에 망토를 덮어주면 이를 뿌리치고 다시 마이크를 쥐는 그의 퍼포먼스는, 가스펠 교회에서 성령이 임할 때 신자들이 보이는 황홀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었다.
기도는 선언이 되었고, 신을 향한 호소는 세상을 향한 요구가 되었다. 그는 음악으로 공동체를 묶어세우는 세속의 목사였고, 그 설교의 핵심은 단 하나였다. 흑인의 구원.
5. 아레사 프랭클린: 부탁에서 선언으로, 수동에서 역동으로.
1967년, 소울의 에너지는 하나의 노래를 통해 정치적·문화적 정점에 달한다.
아레사 프랭클린의 "Respect". 프랭클린의 히트곡의 원곡은 오티스 레딩이 썼다. 원곡의 내용은 남성 화자가 연인에게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지만 아레사는 화자를 뒤바꾸고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며 이 곡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R-E-S-P-E-C-T." 그녀가 철자를 하나하나 폭발적으로 읊어 내리는 브리지 부분은 강렬한 정치적 제스처 중 하나로 꼽힌다. 이것은 더 이상 남녀 간의 사랑 노래가 아니었다. 흑인이 백인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그리고 흑인이 주류에게 던지는 거대한 요구와 외침이었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직후 전미 대도시 곳곳이 분노의 화염에 휩싸였을 때, 라디오에서는 아레사의 "Respect"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흑인을 대표하는 분노이자 선언이었다.
다음 화 예고: 환각과 진흙탕의 유토피아, 반문화 시대의 개막 (1960년대 후반)
흑인들이 생존과 존엄을 위해 거리를 불태우고 있을 때,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는 기성세대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전쟁을 전면 거부하는 백인 청년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이 깊어질수록 청년들의 반전 운동은 급진화되었고,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와 환각제는 그들을 새로운 해방구로 인도했다. 다음 화에서는 '사랑의 여름'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까지, 1960년대 후반을 뒤흔든 히피 반문화와 사이키델릭 록의 연대기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