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환각의 유토피아: 반문화 시대의 개막과 폐막

사이키델릭 록에서 우드스톡까지, 히피 세대의 연대기 (1960년대 후반)

by Johan Na

아레사 프랭클린이 세상을 향해 리스펙트를 요구하며, 흑인들이 거리에서 싸우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백인 청년들은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었다.


1. 아메리칸 드림의 균열: 번영 뒤에 숨은 공허함

1950년대 미국은 겉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압도적인 패권을 손에 쥐었고, 경제는 팽창했으며, 교외에는 새 집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전국에 보급되었고,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출근했으며, 어머니는 부엌에서 파이를 구웠다. 그것이 표면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번영의 안쪽에는 허무와 모순이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소련의 핵폭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책상 밑에 숨는 훈련을 받았고, 텔레비전에서는 베트남 정글에서 타들어가는 마을과 돌아오는 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국가는 그 전쟁이 옳다고, 신성하다고 말했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었다.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되었다.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반전 시위대가 경찰 곤봉에 피를 흘렸다. 선거도, 시위도, 청원도. 아무것도 이 거대한 기계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들은 그 허무함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다. 천국도 지옥도 없고, 나라도 없고, 소유도 없고, 전쟁도 없는, 오직 사랑만 있는 세상. 그들은 지도를 펼쳐 서쪽을 가리켰다.


2. 스위스 연구실의 우연: LSD의 탄생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1943년 스위스 바젤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학자 알베르트 호프만은 샌도즈 제약회사 연구실에서 실험 중 미량의 물질을 실수로 손에 묻혔다. 그는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며 귀가했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LSD 체험을 했다. 눈앞의 세계가 흔들리고, 빛이 넘실거리고, 평범한 골목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했다. 그날은 4월 19일이었고, 훗날 약물 문화권에서는 이 날을 '자전거의 날'이라 부른다.

LSD,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이 물질은 CIA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CIA는 다만 이미 존재하던 물질에 주목해, 냉전 시대 심리 조작 실험인 MK울트라 프로젝트에서 활용했다. 소련 요원을 의지에 반해 전향시킬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CIA는 샌도즈로부터 LSD를 구매해 자국민을 상대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실험 대상 중 한 명이 훗날 이 이야기의 핵심 인물이 된다.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였다.


3. 버스 한 대와 혁명: 켄 키지와 메리 프랭크스터즈

스탠퍼드 대학원생이던 켄 키지는 MK울트라 자원 실험에 참가해 LSD를 처음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이 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국가가 무기로 개발하려던 물질이, 역설적으로 국가를 거부하는 운동의 연료가 된 순간이었다.

1964년, 키지는 버스 한 대를 형형색색으로 칠하고 앞면에 "퍼더(Further)"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 메리 프랭크스터즈와 함께 이 버스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도착하는 도시마다 그들은 '애시드 테스트'라는 LSD 파티를 열었다. 스트로보 조명이 번쩍이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울었으며,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바로 이 파티에서 그레이트풀 데드가 탄생했다.

키지는 히피 운동의 주인공이 아니라 무대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가 씨앗을 뿌린 곳에서, 이후의 모든 것이 자라났다.


4. 하버드의 이단자: 티모시 리어리

같은 시기, 하버드 대학에서는 심리학 강사 티모시 리어리가 멕시코 여행에서 마법 버섯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그는 이후 LSD 연구에 매진했고, 이 물질이 단순한 약물이 아니라 인류 의식 진화의 도구라고 확신했다.

하버드는 그를 해고했지만, 리어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강단 대신 군중을 택했고,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슬로건으로 한 세대를 선동했다. 의식을 깨워라, 현실에 접속하라, 기성 사회에서 탈출하라. 반문화 운동의 대사제라 불린 그의 존재 없이는, LSD와 히피 운동의 대중화를 설명할 수 없다.


5. 헤이트-애시버리: 도시 안의 대안 우주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시버리 지구는 원래 낡고 임대료가 싼 동네였다. 바로 그 이유로 예술가, 학생, 그리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며 이 동네는 하나의 실험실이 되었다. 기성사회의 문법을 전면 거부하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는 시도의 공간이었다.

소유를 버리고 공동체로. 경쟁을 버리고 나눔으로. 군복 대신 꽃무늬 옷을. 단발 대신 긴 머리를. 히피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가치관을 거부한다는, 몸으로 쓴 선언문이었다.


6. 사이키델릭 록: 의식의 확장을 소리로 번역하다

새로운 의식 상태에는 새로운 음악이 필요했다. 기존의 팝 구조, 2분 30초짜리 절-후렴-절의 공식은 이 경험을 담기에 너무 좁았다. 음악가들은 형식을 해체했다.

켄 키지의 애시드 테스트에서 탄생한 그레이트풀 데드는 하나의 곡을 30분 넘게 연주했다. 즉흥 연주가 끝없이 이어졌고, 청중은 그 흐름 속에서 집단적 황홀경을 경험했다. 콘서트는 공연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White Rabbit"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노골적으로 환각 경험에 빗대었다. 한 알의 알약이 당신을 크게 만들고, 또 한 알은 당신을 작게 만든다는 가사가 라디오에서 버젓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1967년, 대서양 건너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비틀즈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한 것이었다. 역재생, 테이프 루프, 현악 오케스트라와 록의 결합.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제목의 이니셜부터 가사까지 사이키델릭 경험에 대한 은유로 읽혔다. 당대 가장 큰 팝 밴드가 이 음악적 언어를 채택했다는 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사이키델릭 록은 더 이상 샌프란시스코 지하 장면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 주류의 언어가 되었다.

기타 연주의 언어 자체도 바뀌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통해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소리를 끌어냈다. 피드백, 와우 페달, 온몸으로 기타를 다루는 방식. 그의 기타는 말했고, 울었으며, 때로는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조롱했다. 흑인 음악가가 백인 록의 형식을 가져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더 도어스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짐 모리슨은 니체와 블레이크를 읽은 시인이었고, 무대는 그의 강연장이었다. 우리는 혼돈의 끝까지 가보려 한다는 그의 말은 허세가 아니라 진지한 예술적 선언이었다. "Light My Fire", "The End". 그들의 음악은 쾌락과 자멸, 해방과 죽음이 뒤엉킨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7.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1967년 6월: 가능성의 증명

우드스톡이 반문화의 절정이었다면, 그 가능성을 처음 증명한 무대는 1967년 6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였다.

3일간 열린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은 미국 최초의 대규모 록 페스티벌이었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몇 개의 전설이 태어났다.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주류 관객 앞에 처음으로 섰고, 기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로 단번에 신화가 되었다. 재니스 조플린은 이 무대에서 텍사스 출신 무명 가수에서 한 세대의 목소리로 도약했다. 더 후, 오티스 레딩, 제퍼슨 에어플레인도 그 무대에 있었다.

몬터레이는 음악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대규모로 실증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이 가능성을 더 크게, 더 멀리 밀어붙이고 싶어졌다.


8. 사랑의 여름, 1967: 유토피아의 절정과 균열

그 여름, 헤이트-애시버리로 무려 10만 명의 청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랑의 여름이었다. 그들은 공동 식사를 나누고,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나눠주었다. 거대한 자발적 공동체가 도시 한복판에 출현했다.

언론은 열광했고, 기성세대는 경악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모순을 품고 있었다. 10만 명이 밀려든 공간에는 식량도, 주거도, 의료도 부족했다. 이상을 꿈꾸며 찾아온 가출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굶주렸다. 무료와 나눔의 철학을 내세웠지만, 자본은 금세 이 문화를 상품화했다. 히피 패션이 백화점에 걸렸고, 사이키델릭 그래픽이 광고에 쓰였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자본주의 마케팅의 새 언어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약물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LSD 다음에는 헤로인이 헤이트-애시버리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도피처를 찾는 손은 더 강한 것을 더듬었다. 유토피아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9. 우드스톡, 1969: 3일간의 나라

1969년 8월 15일, 뉴욕 주 업스테이트 베델의 맥스 야스거 농장. 주최 측이 예상한 인원은 5만 명이었다. 실제로 모인 사람은 40만 명이었다.

우드스톡은 처음부터 통제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고속도로는 수십 킬로미터씩 막혔고, 울타리는 무너졌으며, 입장료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음식이 모자랐고 비가 쏟아졌다. 진흙탕이 된 들판에서 청년들은 3일을 버텼다.

재니스 조플린이 노래했다. 더 후가 Tommy 전곡을 연주했다. 조 카커가 비틀즈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를 원곡과는 전혀 다른 영혼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새벽, 지미 헨드릭스가 무대에 올랐다.

그의 스트라토캐스터에서 흘러나온 미국 국가는 기괴했다. 폭탄 소리처럼 울부짖는 피드백, 피를 흘리는 것 같은 멜로디의 왜곡. 그것은 경의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네이팜탄이 쏟아지는 동안 애국심을 요구하는 나라를 향한, 기타로 쓴 고발문이었다. 40만 명이 새벽 공기 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뒤르켐의 눈으로 본 우드스톡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9세기 말, 원시 종교 의례를 연구하면서 하나의 개념을 제시했다. 집합적 열광, 즉 집단이 함께 모여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리듬에 몸을 맡기고, 같은 감정을 공유할 때 생겨나는 특별한 에너지였다. 그는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신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 집합적 열광이 신을 만들고 공동체를 만든다고 했다.

우드스톡은 이 개념의 20세기 버전이었다.

교리도 없고, 성직자도 없고, 성전도 없었다. 그러나 40만 명은 공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음악, 약물, 진흙, 비. 그 안에서 모두가 같은 감각을 나눴다. 낯선 사람과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뒤르켐이 말한 '성스러운 것'은 종교적 신이 아니어도 됐다. 우드스톡의 무대, 헨드릭스의 기타 소리, 함께 맞은 빗속의 진흙이 그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뒤르켐의 이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집합적 열광은 일상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고, 비일상적인 순간에만 타오르는 불꽃이다. 의례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히피들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우드스톡의 순간을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의례를 삶 전체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성화된 순간은 지속될 수 없었고, 그 빈자리를 헤로인과 환멸이 채웠다.

법도 경찰도 군대도 없이 40만 명이 3일을 보낸 그 공간은, 다른 방식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살아있는 증거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10. 같은 시간, 같은 캘리포니아: 찰스 맨슨

우드스톡이 진행되던 그 여름, 캘리포니아에서는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찰스 맨슨은 히피 공동체의 언어와 형식을 그대로 빌려 자신만의 컬트를 만든 인물이었다. 꽃, 사랑, 공동체, 자유. 그는 이 모든 언어를 구사했지만,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지배와 폭력이었다. 1969년 8월, 그의 추종자들은 배우 샤론 테이트를 포함한 7명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맨슨 사건이 드러낸 것은 히피 이상주의의 치명적인 맹점이었다. 공동체를 꿈꿨지만 그 공동체 안에 비판과 견제의 구조가 없을 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말이 곧 진리가 될 때, 사랑의 언어는 얼마나 쉽게 지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여름, 우드스톡과 맨슨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969년이라는 해가 얼마나 모순적인 해였는지를 상징한다.


11. 알타몬트, 1969년 12월: 유토피아의 사망 진단서

우드스톡이 끝난 지 4개월 뒤, 롤링 스톤스는 캘리포니아 알타몬트 스피드웨이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판 우드스톡을 꿈꿨다.

경호는 오토바이 폭주족 갱단 헬스엔젤스가 맡았다. 공연 중 헬스엔젤스 멤버가 관객 메러디스 헌터를 칼로 찌르고 구타해 살해했다. 롤링 스톤스는 무대 위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알타몬트에서 4명이 죽었다.

히피 이상주의는 알타몬트에서 자신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랑과 평화를 외쳤지만, 실제 폭력에 맞설 구조가 없었다. 공동체를 꿈꿨지만, 그 공동체를 지키는 규칙도, 책임도 부재했다. 뒤르켐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성스러운 순간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세속의 제도를 경멸했다. 그리고 제도 없는 공동체는, 결국 가장 강한 폭력 앞에 무너진다는 것을 알타몬트는 증명했다.


12. 27세

그리고 1970년, 재니스 조플린이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지미 헨드릭스도 같은 해 같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짐 모리슨은 이듬해 파리에서 숨졌다.

모두 27세였다.

가장 뜨겁게 탔기에 가장 빨리 소진된 사람들. 그들이 만든 음악은 남았지만, 그 음악을 만들게 한 이상은 이미 알타몬트의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


13. 포레스트와 제니: 유토피아는 누가 살았는가

이 시대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것은 역설적으로 역사책이 아니라 1994년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다.

어쩌면 포레스트는 주류 미국을 상징하고, 제니는 반문화를 상징하는 캐릭터일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정을 끝까지 따라가면, 반문화 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제니를 보자.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자랐다. 그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녀는 반전 시위에 참여하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며, 히피 공동체 속으로 뛰어든다. 약물을 하고, 자유를 외치고, 체제에 분노한다. 지금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어딘가에 반드시 더 나은 곳이 있다는, 몸으로 표현한 저항이었다. 제니의 삶의 궤적은 이 글에서 우리가 추적해온 반문화 운동의 연대기와 정확히 겹친다. 헤이트-애시버리, 사랑의 여름, 약물, 공동체. 그리고 파국.

그러나 제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녀는 평생을 유토피아를 향해 달렸지만, 달리는 내내 그곳은 항상 다음 도시 너머에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찾지 못하자 더 깊이 약물 속으로 들어갔고, 공동체에서 찾지 못하자 더 과격한 저항 속으로 들어갔다. 유토피아를 향한 갈망이 강할수록, 현재는 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것이 반문화의 구조적 비극이었다. 제니는 결국 병으로 죽는다.

포레스트를 보자.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베트남에 징집되어도 의심하지 않고, 상관이 달리라 하면 달리고, 싸우라 하면 싸운다. 세상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 때문에, 포레스트는 현재에 완전히 머물 수 있었다. 전우 버바와 함께 새우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그에게는 충분했다. 강 위에서 노를 젓는 것이 그에게는 충분했다. 제니 곁에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기에, 지금 그 나름의 유토피아를 경험한다. 새우 사업은 성공했고, 달리기는 전국을 감동시켰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포레스트는 자신이 유토피아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그는 분명히 그 안에 있었다.

유토피아를 가장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 유토피아를 가장 끝내 경험하지 못했고, 유토피아 따위는 생각조차 없었던 사람이 조용히 그 안에서 살다 갔다. 제니가 더 나은 세상을 찾아 달아날 때마다, 포레스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 자체가 포레스트의 유토피아였다.

뒤르켐이 말했던 집합적 열광, 우드스톡 들판의 40만 명이 경험한 그 황홀경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례의 순간에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불꽃이 꺼진 뒤에도 그 온도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은 제니처럼 점점 더 뜨거운 것을 찾다가 소진되었다. 반면 포레스트는 처음부터 불꽃을 찾지 않았다. 그는 그냥 거기 있었다. 그리고 거기 있는 것만으로 따뜻했다.

깃털이 바람에 흩날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흘러가는 깃털. 그것은 제니의 삶이기도 하고, 반문화 운동 전체의 은유이기도 하다. 바람을 따라 더 높이, 더 멀리. 그러나 결국 어딘가에 내려앉아야 한다. 문제는 내려앉을 땅을 거부한 사람들은 영원히 떠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유토피아는 실패했는가

반문화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자본은 더 강해졌으며, 히피 패션은 백화점 매대에 걸렸다. 알타몬트에서 4명이 죽었고, 27세의 천재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으며, 찰스 맨슨은 사랑의 언어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제니는, 평생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다 그것을 단 하루도 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이 실패에는 이상한 역설이 있다. 반문화가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했기에, 이후의 세대는 그 저항이 가리킨 방향을 조금씩 기억했다.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 방식이 유일한 방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긴 것은 지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누군가에게 유토피아는 목적지였지만, 그것은 현재에 가하는 압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압력은, 조플린이, 헨드릭스가, 모린슨이, 그리고 제니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화 예고: 균열 이후의 세계, 펑크와 디스코의 탄생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미국 정치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오일 쇼크가 번영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었을 때, 청년들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런던 클럽에서 "No Future"를 외치는 펑크 록이 폭발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뉴욕 흑인·라틴계 커뮤니티에서 디스코가 타올랐다. 절망과 쾌락, 파괴와 해방. 두 개의 상반된 음악이 같은 시대의 공기를 나눠 마셨다.


매거진의 이전글8부. 소울의 외침: 민권 운동의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