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히어로가 구할 테니 나는 나를 구해보자

에필로그

by 존치즈버거


어릴 때는 내가 향하는 곳이 모두 나의 공간이라 믿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공백들이 나의 캔버스였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그 안에 그려 넣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내가 가질 수 있는 캔버스의 크기가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득 찬 주머니는 어느새 헐거워졌고 남은 재료는 물감 몇 개와 펜 두어 자루. 아무렇게나 낙서해도 용서받을 나이도 훌쩍 지나버렸다. 어릴 땐 어른이라는 존재가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하다 생각했는데 정작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어린 시절의 반의반도 용감하지 못하다. (물론 강한 어른이 용감한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은 캔버스조차 장벽처럼 느껴지고, 제대로 그리지 못할까 두려워 펜을 드는 일조차 뜸해졌다. 묵묵히 그리던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그제야 조바심이 들고 만다. 이래저래 서성이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 내가 과연 죽기 전에 나만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다면 가능하겠지. 문제는 포기하지 않는 뚝심을 가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이다. 얼굴만 오징어인 줄 알았는데 마음속 중심도 흐물흐물 오징어 대가리 같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만 올려다보다 몸속 자존감도 다 증발해버렸다. 이게 무슨 말린 오징어 같은 인생인가.


웬만하면 행복한 인간의 소소한 비법 공유를 목적으로 쓴 글이지만, 쓰다 보니 내가 기뻐해 마지않는 이야기들이 결국은 비참한 생을 견디는 극기(克己)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낭만과 판타지에 흥건히 젖어버려 이성적 상실을 종종 경험했지만, 어쨌거나 제대로 살아보려는 의지로 가득한 글이랄까. 뙤약볕 지렁이도 살아 보려고 꿈틀 대는데 인간으로 태어나 뭐라도 해봐야지 않겠어, 라는 심정. 안간힘을 써 바라보고 또 생각하기.


인생사가 뭐 쉬운가. 좋아하는 것을 100가지 선물해도 견딜 수 없는 1가지가 관계를 망치듯, 평온한 내 삶의 미세한 균열은 견딜 수 없는 1가지에 있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들을 10가지, 100가지 읊어댄다 한들 ‘실패자’로 남아 있는 한 온전한 행복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실패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이 한때를 염원하듯, 비록 실패라고 해도 그것이 ‘지금 한때’라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양으로 조금씩 파여 있고 혹은 뾰족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게 살기 위해 튀어나온 나의 부리를 다듬어야 하는 걸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부리가 어느 순간 벽을 부수는 무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나 그대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웬만하면 행복한 인간은 일종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누군가 끊임없이 외치는 캐치프레이즈는 사실 그 주창하는 이의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내 삶의 결핍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을 누군가도 그 힘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누구든 나는 당신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그 외로움의 형태와 질감은 삶의 모습에 따라 다르겠지만, 외로움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우리는 연대한다.


웬만하면 행복한 인간답게, 앞으로도 쭉 빛나는 앞날에 대한 환상을 품기로 한다. 매일 밤 꺼진 불씨를 살리고 다시 아침이면 민망할 정도로 눈부신 세상 속에 나의 실체를 확인하겠지만. 밤은 곧 오고 세상은 고요함에 물든다. 그럴 때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 나만의 기쁨에 한껏 취한다.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오늘 뜬 태양이 갑자기 내일 사라지지 않듯이. 비참한 기분에 잠이 들어도 내일은 웬만하면 행복한 인간으로 돌아가기로. 그렇게 살자. 버티는 것도 언젠간 커다란 특기가 될지 모르니까. 될 때까지 해야지,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될 대로 되라지, 난 뭐든지 해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