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히긴 쉽지만, 함부로 상처 주지않는 존재들
나는 아이였던 시절에도 어린이를 꿈꿨다. 어른들의 세계를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예의와 사람 좋은 웃음의 뒷면에는 언제나 냉소와 비교가 자리했고, 불시에 드러나는 맨얼굴에선 위선이 스쳤다. 나는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이의 세계를 얕잡아 보거나 그 세계를 해맑은 무지로만 평가하는 어른들을 볼 때면, 차라리 나의 성장이 멈춰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도 어른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나만은 다르겠지.’라고 믿었던 나 자신을 성실히 배신하며. 절대 놓치지 않을 것 같은 꿈들을 분실한 채로 속절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말았다.
한동안 잊고 살던 어린이들을 다시 만난 건 내가 아이를 양육하는 주체가 되면서였다. 아이와 함께 하며 다시 아이의 세계로 복귀했다. 양육 그 자체도 당황스러움을 주지만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제일 당황스러운 점은 딸의 성격이었다. 보통은 아이가 너무 내성적이거나 수줍음이 많아 걱정이라는데 나는 반대다. 딸은 스몰토크의 일인자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먼저 인사하고 모르는 사이에도 안부를 묻고 때론 신상조사도 한다. 붙임성이 상당한 아이와 달리 나는 아는 사람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큰 소리로 인사하지 않고 지켜보는 시간이 없으면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내성적이며 비사회적인 인간이 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제일 활발해지는 내가 이런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나는 아이가 말을 하고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양육 초반의 전전긍긍과는 다른 의미로 식은땀을 흘렸다. 보호자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선 아이의 신변에 관련된 사람들과 나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먼저 다가가는 아이 뒤에서 나는 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턴처럼 흔들리는 동공 아래 침만 삼켰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난감한 처음들이 잦아지자 나도 낯선 타인들 앞에 서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이유 없이 놀이터를 서성여도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다. 휴식을 핑계 삼아 그네를 마음껏 탈 수도 있고, 아이들의 술래를 자처하며 미끄럼틀에서 시원하게 미끄러질 수도 있다. 아이를 핑계 삼아 뽑기도 실컷 할 수 있고 홀로 즐기기엔 철없어 보이는 놀이들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인터뷰이들이다. 거침없고 솔직하고 무엇보다 틀에 박힌 대답이 없다. 흠칫 놀랄 정도로 당돌한 아이들도 있지만 남을 기분 상하게 하려는 의도 따윈 없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꼭 아이의 세계에 무료입장권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엄마에게 책가방을 맡기고 바로 또래들에게 달려가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우리 아이는 꼭 나를 무리에 대동한다. “여긴 우리 엄마야.”라고 인사를 시킨 뒤 꼭 따라오는 말은 “오늘도 엄마가 술래야.” 초반에만 기세 좋게 뛰면 된다. 그다음은 아이들도 체력이 소진되기 때문에 걸으면서 뒤쫓아도 문제없다. 중요한 건 정말 아이들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잡는 시늉만 해야 한다. 팔을 훅 뻗으면 아이들은 볕에 달궈진 빨간 볼을 씰룩이며 꺅꺅 고함을 지른다.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과 함성. 그렇게 서 너 명과 놀다 보면 이내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내 허리를 톡톡 두드린다. “나도 같이 놀아도 돼요?” 이런 날들이 계속되자 내가 놀이터에 가기만 하면 아이들은 “오늘도 술래잡기해요?”하고 먼저 묻는다.
친근해지자 스스럼없이 다가와 내게 자신이 주운 비비탄 총알을 자랑하는 아이들, 자신이 잡은 벌레를 내게 선물로 건네는 아이들, 몇 번 간식을 얻어먹더니 참새떼처럼 우르르 모여 오늘은 뭐 먹을 거 없냐고 당당하게 묻는 아이들, 같이 놀자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우리 딸과 엄마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는 통에 조용히 시키느라 애를 먹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 모든 것이 편하다. 계산 없이 행동하고 보란 듯이 토라지고 때로는 내가 담을 수 있는 이상의 친절을 베푼다. 아이들의 세계는 정말이지 시끄럽고 앞을 예측할 수 없으며 불시에 위기였다가 별안간 평화를 맞는다. 한없이 투명하게 속을 내보이다가도 별 거 아닌 일로 무작정 토라진다. A는 A이고 B는 B이지만 그게 남의 마음을 속상하게 할까 봐 자기 마음에도 없는 C를 말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더 의젓하고 성숙하다. 아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작은 실수들에 얼마나 거듭된 고민을 하는지 어른들은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의 취하는 형식이 난장판일 뿐. 남들 모를 때 난장판으로 살면서 남들 앞에서 젠체하는 어른들보다는 훨씬 가치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난장판은 축제와 같다.
가만히 놀이터에 앉아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한 세계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넘어져 아프면 목이 터져라 운다. 그러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뛴다.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짐승의 웃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생의 정점으로 만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니체가 어째서 인간들에게 종국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고통과 고난에도 삶을 유희하듯 살아라. 그것은 한 명의 사상가가 자신의 사유를 무언가에 빗댄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그렇게 살고 있다. 다만 그 아이들의 세계를 탐탁지 않아하는 것은 오만한 우리 어른들 뿐.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걱정하기 일쑤다. 아이가 젓가락질을 못해서 아이가 자꾸만 넘어져서 아이가 잘하는 게 없어요. 몇 발짝 벗어나 아이들의 세계로 가면 걱정이 무색하다. “우리는 젓가락질 못해도 그냥 팍팍 찍어 먹으니까 괜찮아.” “왼발에 깁스해도 오른발은 안 아프니까 한 발로 뛰면 돼.” “나 눈 감고 줄넘기 넘을 수 있어.” 룰을 지키지 않아 공정에 집착하는 사회를 만들었음에도 어른들은 이상하게 아이들에게만 룰의 파수꾼이 된다. 아이들은 알아서 잘하고 있다. 나나 잘 하자. 나만 잘하면 된다.
우리 집 부엌 창에서는 울타리 없는 개방형 놀이터가 바로 보인다. 권타하고 비루한 오후가 찾아오면 까치발을 들어 그곳을 바라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매일 하루가 새롭게 저들만의 놀이를 발견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생의 활력을 보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만을 쏟아내고 옆자리의 것을 탐내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반쯤 나락에 몸을 걸친 나이지만 나는 소망한다. 저 아이들의 유년에 적어도 흠집 내지 않는 어른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