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 후각, 미각, 시각, 청각이라는 5대 감각 중, 사람마다 타인에 비해 도드라지게 예민한 감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리에 예민한 편이다. 누군가 무신경하게 쾅 닫는 문소리에 상처 받고, 화장실이 아무리 급해도 바람에 달각 거리는 커튼 손잡이를 어떻게든 단단히 고정시켜놓아야 속이 시원한 타입이다. 그러니 소리가 복잡한 곳에 있을 때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엄청나게 소심한 사람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신기하다. 귀라는, 이토록 좁은문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머물렀다 떠난다는 것이.
그러다 보니 카페에 앉아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켜고 우아하게 일하는 행위를 잘하지 못한다. 듣지 않으려 해도 옆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하이힐을 신고 텅 빈 공간을 걷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처럼 명확하게 내 귀로 들어온다. 엿듣는 기분이 들어 괜히 마음이 찜찜하다가도 어느 순간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한 번은 10대 남자아이들 셋이서 진지한 얼굴로 자신들의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차근차근 말하던 목소리가 감정이 이입되며 이내 커지고 있었다. 영어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라 빽빽한 단어장을 외우는 중이었지만 그들의 대화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교복을 입지 않으면 1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에 족히 180은 되어 보이는 신장을 가진 남자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여자 친구의 토라짐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들의 인생 경험을 총동원해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정색을 유지해야 했다. 물론 대화만큼이나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소음에도 잘 반응한다. 이러니 혼자 있을 때 집은 대체로 정적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공기가 없이 살 수 없듯, 공기 속을 부유하는 소리에서도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는 귀를 막지 않는 한 우리의 귀에 살포시 날아와 꽂힌다. 싫어하는 소리에만 집중하다 보면 삶은 지옥일 것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만큼 좋아하는 소리들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귀는 그런 소리들에도 제대로 반응한다. 무신경한 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감동하는 편이다. 그런 소리들을 가진 사람들은 말도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성급한 일반화 일지 모르지만 나는 한 사람이 내는 몸의 소리 또한 고유의 언어로 본다. 배려와 존중이 묻어나는 몸의 소리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것이라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할 땐 좋아하는 소리와 함께 한다. 음악만큼 좋아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즐긴다. 장작이 타 들어가는 소리, 산기슭에서 한가로이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수채화처럼 공간을 엷게 채색하는 빗소리, 시원하게 내지르는 폭포의 소리, 거침없는 타자 소리,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연필 소리, 지그시 낙엽 밟는 소리, 눈길을 걷는 소리들을 듣기 좋아한다. 요즘은 소리들을 믹스하는 어플들도 많아 유용하게 쓰고 있다. 가끔은 장난기가 발동해 도시 소음에 풀벌레 소리나 모닥불 소리를 섞어 보기도 한다.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섞었을 때의 쾌감처럼 묘한 자극이 귓가를 맴돈다. 소리를 한데 섞어 가만히 듣다 보면, 내가 걷고 싶은 공간이 보인다. 나의 말도 안 되는 조합들이 가능하기 위해선 평화가 필요하다. 요원한 꿈의 조각들이 소리로 섞여 공상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로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할 때, 소리를 켠다. 마스카라를 칠할 때면 어김없이 입가가 벌려지듯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선 항상 눈을 감아야 한다. 하나의 감각을 위해 하나의 감각을 잠시 꺼두는 것이다. 소리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동시에 무엇보다 추상적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저 소리를 따라 뒤따르는 의식만이 있다. 더 깊이 소리에 귀 기울이면 자유롭게 호흡하면서도 내 안으로 침잠하는 일이 가능하다. 소리가 만들어낸 공상과 이미지가 이야기를 만든다.
요즘 들어 부쩍, 혐오와 증오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발화의 창구들이 이전보다 다양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계층과 세대를 막론하고 인종과 성별 등 다양한 미움들이 귀를 어지럽힌다. 해로운 말들이 귓가를 타고 혈관을 따라 내 온몸으로 퍼지는 상상을 하면 차가운 욕탕에서도 불에 덴 기분이 든다. 무신경하고 무지에 가득한 편견들에 휩싸일 때면 나는 조용히 내가 조합한 소리들을 듣는다. 회피하려는 생각은 없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우리를 짓이기고 무력하게 만드는 모두 해악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다만, 일상에 지친 내가 자칫 힘을 잃고 그런 말들에 길들여지지 않게 내면을 다스려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말해도 결국 그 말을 정제하고 정수를 가려내 신념과 잘 섞은 뒤 삶의 태도로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니까. 내 안의 소리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따스한 소리의 등불을 켜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쉼 없이 정진하는 타자 소리 때문에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삶의 반경에는 이런저런 제약들이 있지만 펜촉을 바짝 세운 순간만큼은 빈 공간 모두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자리다. 실패라는 단어 속에 나 자신을 규정짓는 목소리는 내 내면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기운을 잃을 때면 나는 쓰는 동안 내 몸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자유롭고 싶다. 자유에서조차 자유롭고 싶다. 자유의 소리를 찾기 위해 나는 끝없이 장벽들에 부딪혀야 한다. 퍽, 퍽, 나의 노력들이 경쾌하게 산산조각 나고 있다. 소리로 나를 다스리고 다시 눈을 부릅떠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