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게요, 때가 되면 돌아오세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대한민국, 어릴 때 교과서에는 자주 이 말이 등장했다. 그때는 물을 사 먹는 것도 우습게 느껴지던 시절이라, 계절이 한 나라의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일 년 내내 여름이라는 싱가포르의 기후를 알고 나서는 사계절이 특산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다른 나라에도 사계절이 있음을 알고, 뚜렷하던 계절의 경계는 기후 위기로 점점 변덕스럽게 변해가고 있지만.
나는 딱히 선호하는 계절은 없다. 그 선호 없음에 모든 계절이 내게는 그 자체로 만족스럽다. 다만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와 냄새를 가졌다는 것은 안다. 계절의 냄새를 처음 알려 준 사람은 나의 친구 S였다. 그녀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가을이 오나 봐. 젖은 헝겊이 불에 타는 냄새가 나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계절에 냄새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염이 심했던 나는 장마가 오면 크리넥스를 준비하고 단풍이 물들면 가습기를 켜고 자야 한다는 사실만 알았다. 냉소적이라면 세상 저리 가라였던 친구였지만 계절의 냄새에서만큼은 유난히 감성적인 모습을 보였고 친구는 내게 계절의 통역사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늘 귀신같이 계절의 냄새를 맡았고 그 냄새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적절히 묘사해주었다. 계절이 들어설 때의 냄새와 머물렀을 때의 냄새 그리고 이제 슬슬 떠나려 할 때의 냄새가 다 달랐다. 향긋한 비릿함을 머금은 봄의 냄새는 저녁부터 진동했고, 여름은 더운 공기 속에 솔잎향과 마른안주를 동시에 내민다고 했다. 가을은 낙엽 밟는 소리보다 타들어가는 냄새가 먼저 고개를 내밀고 겨울은 바닷가에 위치한 산등성이 냄새를 피운다고 했다. 그녀는 계절의 냄새를 선물하고 옛 우정이 되었다.
계절은 언제나 있다. 우리가 우주에 가지 않는 이상, 계절 없이 사는 삶은 공기 없이 사는 삶과 같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계절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연한 것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만히 계절에 집중해본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흘려보내고 마니까. 계절의 냄새와 온도, 습도와 분위기, 특유의 공기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느낀다. 조용히 계절에 집중하면 계절은 기다렸다는 듯 금세 자신의 틈새를 열어 보인다. 계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모두 다르다. 계절을 견디는 사람들의 얼굴도 조금씩 다르다. 계절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도 다르다. 계절이 당도했음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다가 올 계절을 섣부르게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매년 돌아오는 계절임에도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계절을 마음에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다. 어느 한 계절 정성껏 만든 나의 역사는 다시금 돌아오는 계절에 추억이 되고 만다. 계절은 충실히 회귀하지만 같은 계절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세상사 별 일이 다 있어도 내가 주관하는 삶이란 대부분 평범한 경우의 수 안에서 움직인다. 이때는 이렇고 저쯤 되면 저렇겠지 하다가도 봄만 오면 꽃잎이 분분이 날리듯 내 마음도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나부낀다. 만물은 생동하는데 나만 이렇게 골방에서 공백만 메우나 싶다가도, 아무 수고 없이 저 혼자 꽃도 피고 바람도 전해주고 그러다 가끔 앙증맞은 가랑비도 데려오는 봄을 사는 것이 새삼 고맙다. 흘러간 어린 마음과 한참을 더 살아야 당도할 나의 늙음이 한데 뒤섞여 괜히 얼굴 붉어지게 하는 계절. 그야말로 싱숭생숭한 계절을 나면, 우주에 구멍이 뚫린 듯 태양빛이 정수리 위에 마구 쏟아지는 여름이다. 그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추억들로 가득한 계절. 집순이인 내가 유일하게 먼저 발 벗고 나서는 계절이 기도 하다. 비행기도 타고 배도 타고 안 하던 짓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나 꾸러미가 커진다. 멋 부리고 싶은 가을과 크고 작은 이벤트로 정신없는 겨울을 보내면 나이 하나 더 먹은 채 다시 제자리다. 여전히 나는 나이고 아직도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히치하이커 신세지만 내가 보낸 사계절은 다가 올 계절과 다른 그 고유의 이야기를 가진다.
참 좋다. 계절이란 내가 무얼 주지 않아도 충실한 친구처럼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다. 계절의 인기척을 코끝 아래 느끼며 풍경을 바라본다. 무얼 하지 않아도 그대로 계절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산더미 같은 고민을 잠시 발아래 내려놓고 가만히 나의 감각을 열어 놓으면 이보다 더 값진 호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