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살인마 잭의 집
반의어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면서도 특정 부분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단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라스 폰 트리에의 관계가 그러하다. 놀란과 트리에는 작가주의 계보 속에서 완전한 대척점에 서있는 듯하다. 우선 두 감독 모두 리얼리즘적인 묘사와 직관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확고한 스타일과 작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몇몇 부분에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보여준다. 놀란은 드라마적인 접근을 사용하는 반면 트리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을 차용하고, 전자는 맥시멀한 연출을 지향하지만 후자는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한다. 더 나아가 놀란은 휴머니즘을 주로 다루지만, 트리에의 사유는 모두 반-휴머니즘을 향해있다. 그렇기에 이 두 감독의 영화는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인상을 심어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인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 등을 살펴보면, 작가주의의 인장으로써 작용하는 복잡한 플롯 장치를 걷어내고 나면, 매우 친절하고 직관적인 휴머니즘 드라마가 영화 전반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부분은 애인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혹은 포괄적인 인간애를 다루며 평면적인 선역의 설정을 통해 그 주제를 훨씬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는 감독답게 제작 규모 자체가 크다. <다크 나이트>에서 트럭을 실제로 뒤집거나 건물을 실제로 폭파한다던지, 혹은 <테넷>에서 비행기를 실제로 추돌시키는 모습을 보면 쉽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안티크라이스트>같은 대표작들을 보면 우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짙은 라스 폰 트리에의 스타일이다. 1995년의 도그마 95 선언을 이끌었던 감독 중 한 명으로서 큰 영향을 받은 트리에의 스타일은 극도로 냉소적인 핸드헬드와 줌에서 폭발적으로 작용하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이 스타일을 배제한다고 해도 인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내러티브와 공감할 수 없는 입체적 인물, 역설과 조소로 점철된 각본 등 영화 자체는 놀란 영화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연출 방식에서는 실제 장소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한 공간을 꾸준히 다루는 미니멀함이 엿보인다. 즉 크리스토퍼 놀란과 라스 폰 트리에는 리얼리즘이라는 커다란 뿌리 아래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있는 갈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의 <다크 나이트>와 트리에의 <살인마 잭의 집>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다. 이번 글에서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 이 두 작품 속에서 다루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을 살펴보자.
이원론은 세계를 바라보는 유서깊은 시각이다. 플라톤의 이론이나 동양 철학의 ‘공’ 개념에서부터 우리는 세계를 두 가지로 나누기 시작했다. 형이상과 형이하, 색과 공, 물질과 정신 등의 이원론적인 접근은 도덕이나 미학에서도 등장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부조리, 미와 추는 세계를 지향점과 지양점으로 나누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우리의 사유 속에 자리잡았다. 이런 이원론의 편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에서 나온다. 배중률은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라는 문장으로 해석되는데, 결국 세계 속에서 어떤 특징을 집어내 긍정과 부정으로 세계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배중률의 고전적 항진성으로부터 정당성을 얻는다.
이러한 이원론에게 위협이 되는 개념은 바로 일원론이다. 세계를 이루었던 서로 다른 두 부분이 사실은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이나 한 부분만이 유효한 세계라는 주장은 기존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무참히 붕괴시킨다. 예를 들면 오컴의 윌리엄이 제창한 유명론이나 불교 철학 속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형이상과 형이하의 이원론을 전면 반박한다. 이때의 일원론자들은 이원론이 결과적으로는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곧 이원론적 세계에 큰 수정을 요구한다. 바로 이원론적 접근의 폐기를. 그렇기에 일원론은 이원론적 세계의 반향이자 위협이다.
일원론의 위협적 존재는 매우 강력하다. 이는 이원론의 효율성 만큼이나 강력하고, 그렇기에 단순한 방법으로 큰 임팩트를 남긴다. 심지어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라스 폰 트리에와 같은, 완전한 양극단에 서있는 작가의 방법론을 동시에 관통한다. 이 점에서 <다크 나이트>의 카타르시스는, 그 모든 정반대의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살인마 잭의 집>의 카타르시스와 같은 원리를 가진다.
<다크 나이트>는 기존의 슈퍼히어로가 가지는 이원론적 논리 구조인 선-악의 대비를 질서-혼돈의 대비로 확장시켰다. 우선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공포와 정의, 자본과 기술 등 다양한 소재를 하나로 융합해 전형적인 선악 구도를 벗어났으며, 이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대비를 통해 영화 자체의 갈등 구조를 질서와 혼돈의 대결로 발전시켰다. 고전적인 히어로 장르의 이원론적 선악 구조와 개념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비슷하다. 선은 질서로, 악은 혼돈으로 확장된 형태로서 <다크 나이트>는 선택과 딜레마, 그리고 게임 이론적 문제 제시를 통해 흥미로운 시각을 이어나간다. 즉 영화의 중반까지는 질서-혼돈의 이원론적 구조의 정립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체도 매우 훌륭하지만, 중반부를 지나 하비 덴트의 투페이스 캐릭터가 등장함으로서 영화는 그 깊이를 스스로 배가시킨다. 질서의 화신인 배트맨과 혼돈의 화신인 조커 사이에서 하비 덴트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둘의 본질이 같다고 주장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질서와 혼돈은 ‘운’이라는 거대한 원리 아래에서 결정되기에 아주 사소하다는 것이다. 복수의 대상을 죽일지 살릴지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는 하비 덴트의 행동 규범은 곧 질서와 혼돈을 위한 노력은 모두 운으로 환원되는 것이 우리의 세상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질서와 혼돈은 그저 운 아래에서 결정되는 것,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임을 잔인한 방법으로 각인시킨다. 이 점에서 하비 덴트의 타락은 <다크 나이트>를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중반부까지 영화가 집중하던 질서와 혼돈의 이원론적 구조를 하비 덴트가 일원론으로서 모두 붕괴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결말에서 배트맨이 누명을 쓰고 처절히 달아나는 모습은 하비 덴트의, 일원론의 승리를 비추는 증거였다. 결과적으로 배트맨과 조커 모두 몰락하는 후반부의 카타르시스는 하비 덴트라는 일원론이 배트맨과 조커의 이원론적 세계를 붕괴시킨 데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살인마 잭의 집> 또한 같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의 영화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의 사고방식과 통념을 먼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가 가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우리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순수성과 야수성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 그러므로 서로 독립적이고 다르게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인식한다. 전자는 모두 우리가 추구해야 하며, 후자는 멀리해야 하는 가치들이다. 이러한 설정은 자연스럽게 이원론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즉 세계의 모든 요소가 우리 스스로의 선과 악에 대한 준거에 빗대어져 재단된다. 이때의 준거는 마치 선과 악이 각각 양 끝에 위치한 스펙트럼과 같다. 선과 악에 각각 얼마나 가까운지를 통해 선악을 판별하고 이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선악에 관한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을 통해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지향점과 지양점을 손쉽게 분리해낸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의지에 녹아들어있는 사고이다. 우리는 선을 좇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어떤 의지에 ‘선‘이라는 가치의 추구가 들어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노력, 반성, 자아실현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의지 속에는 모두 선으로의 기대가 반영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의지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 바로 금기이다. 어떤 의지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들어있기를 바란다면, 이는 곧 악을 추구하는 모든 의지를 배척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우리의 행동 규범이나 기본적인 사고의 틀 속에도 금기시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한다. 예술에서는 이 금기가 더욱 크게 작용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영화 <크루엘라>의 악인 크루엘라가 동물학대를 한다는 (혹은 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여론은 예술 속 금기를 최대한 멀리 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증한다. 즉 우리는 이원론적 세계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한 쪽로부터 보호하고, 다른 쪽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여느 영화와 같이, 우리의 이 통념을 알량한 고집에 불과하게 만들어버린다. <살인마 잭의 집>의 주인공 잭은 감독 스스로의 일부가 투영된 캐릭터이고, 아주 냉혹하고 집착적인 사이코패스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매우 지적이고 현학적이기에 지옥으로 가는 동안 길잡이 버지(베르길리우스)에게 자신의 신념을 소개한다. 이 신념이란, 살인을 통해 숭고한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잭은 자신의 이야기 중간중간 나레이션으로 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이 신념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양>과 <호랑이>, 고딕 건축의 특징과 성당의 숨겨진 공간, 특이한 와인 숙성 방식, 슈페어의 폐허가치 이론 등등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흥미로운 온갖 논점을 모두 꺼내온다. 그리고 이 모든 논리는 ‘선악은 공존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음으로서 양은 영생에 다가가며, 포도의 부패과정이 와인의 풍미를 더 깊게 만들거나 자연의 풍화와 부식이 그 건축물의 가치를 높인다는 폐허가치 이론은 결국 파괴와 혼돈이 창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심지어는 옆에서 말을 듣고있는 버지의 대표작 <아이네이스> 또한 기존의 작법을 파괴함으로서 성취해낸 미학이라고 평가하며 자신의 논리로 끌여들이기도 했다. 이 모든 주장은 창조가 파괴로, 또 파괴가 창조로 변모하며, 선과 악이나 순수와 야수, 천국과 지옥은 공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는 이러한 잭의 주장을 연출의 모티브로서도 살려내고 있다. (글을 이어나가기 전, 이 영화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이 마찬가지이지만, 이 작품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금기를 다루는 감독의 작품이니만큼, 이 영화는 잔혹하거나 일부 혐오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아주 냉정하게 보여주기에 이를 설명하는 글 또한 이와 닮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경고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중반부 잭이 냉동한 시체를 들고 살해 현장으로 다시 가는 도중, 잭은 또 한 명을 차로 들이받아 살인한다. 결국 잭은 차갑게 얼어붙은 시체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시체를 모두 살해 현장으로 가져가 사진을 찍는다. 이때 차의 헤드라이트 한쪽에 피가 묻어 붉은 빛으로 면하는데, 영화는 이를 피가 묻은 헤드라이트의 붉은 빛과 묻지 않은 쪽의 푸른 빛을 한 장면으로 담아낸다. 또, 재클린이라는 여성을 살해하기 전 신체를 도려내기 위해 피부에 선을 긋는데 이때의 마커가 빨강색과 검정색이라던지, 지옥으로 향하는 길에서 잭과 버지의 의상이 각각 빨갛고 검다던지, 지옥에 있는 물레방아의 한쪽은 물이 흐르지만 다른 쪽은 얼어붙어 있다던지. 영화 전반에는 서로 다른 양 극단의 요소가 한 장면 속에 함께 등장하는 연출이 주 모티브가 된다. 이 외에도 잭이 생명의 소리라고 느끼는 ‘금속의 숨소리‘는 풀을 베며, 즉 죽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리리는 점에서 잭이라는 인물이 숭고함을 느끼는 것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잭이 필름을 현상하지 않는 채로 가지고 있는 것 또한 흑백이 반전된, 즉 흑 속에 백이, 그리고 백 속에 흑이 배치되어있는 형상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지옥의 모습도 이와 같은데, 지옥과 천국은 창문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결국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 축복과 죄악 모두 공존하며 어느 한쪽이 우위를 가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잭이 우리에게 던지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다. 잭 자체가 일원론으로서 기능한다.
잭이라는 일원론은 우리의 통념에 도전한다. 언뜻 들으면 말이 되는 논리는 ‘살인이 예술이 된다’는 궤변으로 이어지기에 우리는 잭의 이야기에 현혹되는 동시에 잭과 거리를 둔다. 잭의 논증은 우리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왔던 선악이 분리된, 천국과 지옥이 분리된 세계는 잭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한다. 양극단이 언제나 공존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도덕관과 세계는 모두 붕괴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살펴보았던 우리의 기본적인 이원론적 사고와 그에 따른 의지 모두 부정당한다. 이것이 라스 폰 트리에가 이 영화를 통해 보이고 싶었던, 우리의 관습적인 사고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한 쟁점인 것이다. 그래서 <살인마 잭의 집>은 그 잔혹한 표현 수위와 넘쳐나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노골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카타르시스 또한 <다크 나이트>와 같이 우리의 이원론적 세계를 붕괴시키는 일원론의 제시에서 나온다.
이원론의 세계를 붕괴시키는 일원론의 제시는 우리 사고의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며 매우 강력한 소재이다. 이런 논점들이 영화를 받치는 기저 논리가 되어 영화 속 사유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어떤 영화는 다른 어떤 영화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과 라스 폰 트리에처럼,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 보이는 두 영역은, 그럼에도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 연결 고리는 그 영화의 기저 논리를 보았을 때 등장한다. 영화는, 또 예술은 몇 개의 사유를 가지고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기에 우리는 가끔 그 영화의 흐름을 타고 핵심에 다다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감상의 깊이를 얻어내는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468569/mediaviewer/rm4147693313?ref_=ttmi_mi_all_sf_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