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글래스
‘슈퍼히어로’라는 단어는 어느 분야의 예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초능력을 가지며 절대다수를 위해 싸우는 슈퍼히어로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의 갈등 구조는 고전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서사 구조 이외에도, 절대선과 절대악, 슈퍼히어로의 덕목인 ‘정의’, 위기를 조성하는 조연의 설정 등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 대부분이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이는 분명히,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고 수요와 공급 모두가 폭발적이었던 장르의 역사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릴러 장르에 대해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가 클리셰를 정립한 역할로서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극 예술에 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현재의 시각에서는 클리셰의 정립에 있어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모든 클리셰들은 어떤 하나의 존재가 혜성처럼 나타나 만들어낸 것이 아닌,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 열성적인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최초의 영화, 최초의 만화는 존재하지만,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자체가 많은 관객에게 큰 인기를 오랫동안 끌었던 점과, 그렇기에 수도 없이 많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제는 클리셰만을 가지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해 관객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술가들 또한 클리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해왔다. <데드풀>과 같이 의도적으로 흩트려놓은 선악의 경계, <브이 포 벤데타>와 같은 사회적 메세지와의 결합,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과 같은 극도의 작가주의,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와 같이 깊은 철학적인 깊이. <메가마인드>,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왓치맨> 등등 많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들이 그 고전적인 클리셰를 극복해왔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는 영화의 양산이 아닌, 평등, 정의, 폭력의 정당화, 선악 등등 다양하고 깊은 성찰을 풀어낼 수 있는 장르로 성장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룰 두 영화인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과 <글래스>는 이러한 장르적 성장을 혁신적으로 보여준 영화들이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명작이라고 평하기는 힘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마블에서 진행하는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청소년의 성장 드라마를 기본 서사로 가져가기 때문에, 타 마블 영화들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고민이나 갈등의 정도 또한 상대적으로 그 강도가 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시리즈가 택하는 이점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 주인공만의 상황이나 감정을 살려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장르의 특성상 몰입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결국 대부분의 영화는 사회적 합의 하에 존재해야 하므로 영화에서 다뤄지는 청소년의 갈등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에 대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에서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접근과 일반적인 하이틴 장르에 대한 접근은 공존할 수 없다. 필자는 이 점에서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의 패착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하이틴 장르와 성장영화로서의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요소가 섞여 흥미로운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좋은 영화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장르로서 이 영화를 보면, 과도한 서사, 몰입을 방해하는 유머, 어울리지 못하는 연출과 연기 등의 명확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에 대해 필자는 평작 혹은 그 이하라고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이 만들어낸 장르적 진화 때문이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 대부분 또한 느낄 수 있었을 것이,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의 스토리 전개나 소재는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와는 다르게 현실에 대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특히, 그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참신한 방법론을 채택했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의 악역인 ‘미스테리오‘ 혹은 쿠엔틴 벡을 살펴보자. 쿠엔틴 벡은 토니 스타크에게 버림받은 (물론 작중 인물의 의견이다.) 인물 중 한 명이다. 쿠엔틴 벡은 자신과 함께 토니 스타크에 대한 열등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옛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스타크에 대한 복수심이나 보상심리를 바탕으로 토니와 같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계획을 실행한다. 이때 벡의 계획이 매우 비범하다. 바로 자신이 개발해낸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대중에게 가상의 위험을 만들고, 가상의 히어로를 통해 그 가상의 위험을 제거해 영웅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결국, 쿠엔틴 벡은 대중심리를 조작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의 계획이 비범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 사회와 매우 가까운 방법으로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허상을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을 조성한 후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는 쿠엔틴 벡의 모습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보아왔던 모습이다. 러닝타임 내내 벡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쿠엔틴 벡을 보았을 때 느끼는 기시감은 우리의, 혹은 인류의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던 방식으로 피터 파커와 대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시감은 의도적으로, 또 아주 정교하게 연출된 것이며, 그렇기에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슈퍼히어로 장르 속에서 사회 고발적 메시지를 새롭게 풀어내 장르의 진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캐스팅을 살펴보면, 쿠엔틴 벡 역은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했다. 사실 제이크 질렌할의 이미지는 일부 고착화되어있다. <조디악>, <나이트 크롤러>, <옥자>, <벨벳 버즈소>와 같은 영화에서 제이크 질렌할은 항상 저널리즘 윤리와 관련해 깊은 성찰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에서 연장된다. 쿠엔틴 벡은 고도의 과학기술을 통해(기술의 발전과 정보 접근성) 자신이 만들어낸 홀로그램(가짜 뉴스)으로 대중에게 ‘미스테리오‘를 각인(여론 조작)시킨다. 이는 항상 민주주의의 뜨거운 감자였던 언론 조작과 대중심리, 기자 윤리, 기득권의 여론 통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쿠키 영상으로 이어지는 쿠엔틴 벡의 죽기 직전 남긴 메시지는 오히려 노골적으로도 보인다. 대중에게 미스테리오와 스파이더맨의 선악 프레임을 씌워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쿠엔틴 벡의 모습은 관객에게 몰상식한 소시민적 언론 수용을 비판하면서 그와 동시에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J. K. 시몬스의 대사 또한 자극적인 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닉 퓨리와 힐 요원이 스크럴 종족의 변장이었다는 설정 또한 진짜와 가짜에 대한 테마를 환기해주는 역할을 한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고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회 문제를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속에 투영시킨 것이다. 이는 어느 영화와도 다른 결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도 언급했던 <브이 포 벤데타>는 (물론 만화 원작이지만) 슈퍼히어로 장르와 사회적 메시지를 합쳐 만들어낸 영화이다. 하지만 <브이 포 벤데타>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낸다. 영화의 배경, 스토리라인 등 영화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전혀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 영화의 세계관에 완전히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브이 포 벤데타>와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슈퍼히어로’ 장르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슈퍼히어로 장르에 있어 꽤 혁신적인 접근을 가지는 영화이고,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단점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가 빛을 발한다.
M. 나이트 샤말란의 <글래스>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장르의 진화를 가져왔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이 작법에 있어서 혁신적이라면, <글래스>는 장르 해석에 있어 혁신적이다. 우선 <글래스>라는 영화에 대해 살펴보자. <글래스>는 전형적으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다운 영화이다. 매우 독창적인 세계관과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반전이 이를 보여준다. 특히나 영화 속 세계관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맞춰 19년이 지난 후에 삼부작을 완성했다는 점 또한 매우 작가주의적인 면모가 잘 보이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글래스>는 슈퍼히어로에 관한 영화이고,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이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시각효과와 강력한 액션 장면을 기대하지만, 이 영화의 연출은 그런 관객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슈퍼히어로 장르는 개연성이 떨어지므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인물과 카메라의 간격이 좁다. 반면 <글래스>는 슈퍼히어로도 일반인과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인물과 관객 사이를 최대한 멀게 한다. 영화의 엔딩과도 관련이 있지만, 중간마다 카메라로 장면을 보는 듯한 연출도 인물과 관객 사이를 최대한 띄어놓아 관객이 인물들에게 몰입하지 못하도록, 그럼으로써 작중 엘리 스테이플 박사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글래스>가 슈퍼히어로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글래스>는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슈퍼히어로 장르의 한계점이 존재한다면, 낮을 수밖에 없는 개연성일 것이다. 현실 세계에는 슈퍼히어로가 없고, 슈퍼히어로 장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슈퍼히어로가 존재한다‘라는 전제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슈퍼히어로가 존재한다’는 명제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에게 슈퍼히어로 장르는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말인 즉 슨, 슈퍼히어로 장르는 관객에게 슈퍼히어로의 존재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글래스>는 이 점을 파고든다. 슈퍼히어로란 없고, 그전까지 슈퍼히어로라고 믿어왔던 존재들은 병적인 존재라면,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이고, 엘리 스테이플 박사의 주장은 <글래스>라는 영화에 대해 이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 즉, <글래스>는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의 전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엘리야의 마지막 계획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슈퍼히어로에 대한 어떠한 고찰 이전에, 슈퍼히어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즉 슈퍼히어로 장르의 대전제 자체에 대한 의구심에 대해 대답을 남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동영상 플랫폼으로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비춰지고 수많은 사람이 슈퍼히어로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곧 이 세계관에서 장르의 대전제에 대해 의심이 해결되고, 결국 대전제가 강요되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글래스>는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대한 영화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존재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그 존재의 내부에서는 불가능하고, 외부에서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다. <글래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또한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이지만,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을 위해 최대한 비-장르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만일 <글래스>가 여느 슈퍼히어로 영화와 같이 연출되었다면 오히려 진부하고 유치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글래스>는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를 규정하고 고민한 영화이고, 그렇기에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이러한 고민 없이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제자리걸음과도 같은 꼴일 것이다. 결국, <글래스>는 이제껏 해왔던 장르로의 접근을 한 차원 높여 장르의 진화를 개척해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특징 중 하나는 큰 범용성이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창작물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플롯, 주제의식, 작법과 연계되어 흥미로운 예술적 시각을 만들어냈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여러 영화들이 그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일부 장르영화들에 의해 범용성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에 의해서는 장르의 문법 속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론의 확장, <글래스>에 의해서는 장르 자체의 논리적 정립과 성찰이 이루어졌고, 이 발자취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있어 가늠하지 못할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이후 차세대 창작자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게 될지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모든 예술은 답습을 타파하는 과정 속에서 자라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또한 예술 자체의 추상화와 확장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트렌드고, 이 새로운 트렌드는 곧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온다. 비록 대중에게서는 난해하고 기괴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그 새로운 시각은 깊은 고찰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답습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자라온 예술은 걷잡을 수 없이 진화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글에서 이야기한 슈퍼히어로 장르의 진화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클리셰라고 불리는 자가복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매우 흥미롭고 발칙한 방향으로의 진화는 모두 깊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비록 그것이 난해하거나, 완성도가 낮거나, 재미가 없어도 말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6823368/mediaviewer/rm146162688?ref_=ttmi_mi_all_sf_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