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말코비치 되기
<존 말코비치 되기>는 스파이크 존즈의 감독 데뷔작이자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가 데뷔작이다. 물론 스파이크 존즈와 존 쿠삭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의 역량이 빛을 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말코비치 되기>가 찰리 카우프만의 거대한 지배 하에 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분명히 본작은 모든 측면에서 매우 출중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번 글에서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에만 집중해보고자 한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체적인 흐름을 짚으려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은 또다른 대표작인 <이터널 선샤인>과 비슷한 결을 지닌다. 일상적인 세계관 속에 매우 특이한 요소 하나를 주입하여 어떤 하나의 결말을 도출하는 구조인 두 작품은 찰리 카우프만의 상상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낸다. 예컨대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기억을 지우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라쿠나 사가 있고,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존 말코비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포탈이 있는 셈이다. 각각의 주인공은 이러한 독특한 세계에 진입하여 스토리를 전개시킨다. 일종의 케이퍼 무비의 형식을 띤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각본은 이 독특한 세계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고, 주인공이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동기를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를 하며, 결과적으로는 예상할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터널 선샤인>과 <존 말코비치 되기>의 두 작품 모두 순환적인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순환 구조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후술할 예정이다.)
또한 소재의 유사성도 있다. 찰리 카우프만의 독특한 세계는 꿈이나 인형극으로 대표되고, 이는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원형과 연결되어있다. 다만 전자는 사랑에 관하여, 후자는 존재 일반에 관하여 고찰을 품고 있다는 점이 다르나, 중심적인 소재와 그 소재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유사하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무의식을 누비며 기억을 지우려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는 시퀀스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맥신과 라티가 말코비치의 무의식 속에서 추격전을 벌인 시퀀스가 그러하다. 소재와 방식은 유사하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는 것이다. 결국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이터널 선샤인>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기에, 함께 감상하거나 옆에 놓고 분석해 보면 좋을 듯하다. 본 글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언급한 이유도, <이터널 선샤인>이 본작보다는 감상의 난이도가 낮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에선 본작의 각본만 다룰 것이기에 또 다른 연관성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될 듯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존 말코비치 되기>를 들여다 보자.
<존 말코비치 되기>의 주인공은 크레이그 슈워츠이고, 성공하지 못한 인형사이다. 그는 스스로도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그의 인형극이 다루는 소재에 있다.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크레이그의 인형극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더 적나라한 것은 그의 길거리 공연이다. 인형극 속 인물들의 뒤틀린 성적 욕망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의 인형극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음탕한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크레이그의 인형은 그와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실제로 맥신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 후 크레이그는 맥신의 모습을 닮은 인형을 정성스레 제작하고,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형과 대화를 나누게 하고 키스를 하게도 시킨다. 결국 크레이그는 인형극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다. 이후 그가 말코비치의 내면으로의 포탈을 발견했을 때에도, 말코비치라는 인형을 조종해 자신의 욕망을 발현시킨다고 서술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세계란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는 그의 육체로 표현되는 실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형으로 표현되는 인형극의, 욕망의 세계이다. 이 지점에서 말코비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포탈은 이 두 세계가 연결되는 샛길이 된다. 예를 들어 크레이그나 라티는 모두 맥신과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즉 아주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 포탈을 사용했다. 욕망의 세계로의 진입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형극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곤, 신문의 구인광고를 통해 레스터 사에 찾아간다. 이 레스터 사 또한 매우 특이한 설정을 지니고 있는데, 레스터 사 사무실은 ‘마틴 플레머’ 빌딩의 7과 1/2층에 위치해있다. 작중 옥타비아 스펜서가 카메오로 등장해 크레이그를 7과 1/2층에 데려다 주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엘레베이터가 7층을 지났을 때 비상 멈춤 버튼을 누르고, 쇠지렛대로 문을 열어 7과 1/2층에 도착하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심지어는 희화적이기까지 한 설정이다. 이렇게 문을 열고 천장이 낮은 7과 1/2층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가면 레스터 사가 나온다. 레스터 사의 인물들도 그 장소만큼이나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응대와 비서 업무를 맡고 있는 플로리스는 크레이그의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고,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이와 반해 사장 레스터 박사는 소통에 아무 지장이 없음에도 스스로를 말더듬이라고 칭한다. 크레이그의 입사 면접에서 그는 문자가 아닌 기호를 들고 무엇이 알파벳 순서상 먼저냐고 물어보고, ‘언어장애학’을 전공한 플로리스의 돌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특이한 것은, 105세인 레스터 박사가 크레이그에게 플로리스를 향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원색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노골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영화의 인물 세팅은 다분히 프로이트적이다. 영화가 불쾌할 정도로 원색적인 대사를 품고 있는 이유도, 이 인물들의 욕망은 모두 리비도, 즉 성적 욕망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라티의 성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남근 선망(penis envy)에서 비롯된 것이며, 비슷한 맥락의 대사가 레스터 박사의 친구와 라티의 대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레스터 사와 7과 1/2층은 무의식의 커다란 비유이다. 들어가기 까다로운 7과 1/2층, 그 속에서 리비도의 노골적 표출을 보이는 레스터 박사, 이후 발견되는 말코비치 포탈의 존재와 맥신의 존재까지. 레스터 사는 무의식의 세계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 무의식의 세계는 외부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중간 과정의 억압과 검열을 거쳐 의식의 세계로 표상을 전달한다. 이것이 플로리스와 레스터 박사의 언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레스터 박사가 언어라는 고독한 탑에 갇혀있다고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리스가 ‘언어장애학’을 전공했다는 것도 재밌는 유머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반대로 레스터 사 바깥, 크레이그와 라티, 맥신의 공간은 의식의 공간이다. 의식의 공간에서 욕망의 세계인 원초아, 이드에게 닿기 위해선 무의식의 공간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에 말코비치 포탈이 레스터 사의 ‘DEEP STORAGE’ 칸에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 해석은 여기에서 잘 작동하지 못하는 데, 이는 존 말코비치의 등장에 의한 것이다. 말코비치 포탈을 통과한 사람은 말코비치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데, 그렇다고 이것이 비물질적 세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말코비치라는 정체가 의식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심지어는 이후에 말코비치 포탈을 통해 말코비치의 의식까지 점령해버린다. 결국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세계는 마냥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의식과 의식의 대조는 유효하다. 왜냐하면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는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에서 또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중 가장 처음 단서로 드러나는, 라티가 말코비치의 심리를 조종한 것을 생각해보면,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무의식과 의식은 인형사와 인형의 관계에 있다.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말코비치의 몸을 조종하는 것은 마치 크레이그가 그의 인형을 조종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대사의 ‘w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초반에 크레이그는 “작업실에 가있겠다”라는 말을 “We will be at the work”라고 한다. 인형과 본인을 함께 지칭한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we’라는 대명사는 말코비치 속에서 사용되는데, 라티가 “We love her”라고 하거나, 이후 레스터 박사와 친구들이 말코비치의 무의식으로 들어온 후 “We are Malkovich”라는 하는 등, 인형과 인형사, 곧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의 총체로 지칭한다. 이 점에서 <존 말코비치 되기>는 자아의 성립 원리를 제창한다. 말코비치 포탈 이전엔 무의식과 의식은 분명한 경계가 있어보였으나, 본작의 세계관에서 자아란 무의식과 의식의 융합이다.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내면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말코비치 속 크레이그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말코비치 한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각은 불완전하며, 무의식과 의식이 통틀어 존재해야만 하나의 온전한 자아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쯤 우리는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온전한 자아란 무엇인가. 말코비치 포탈을 발견하기 전의 크레이그와 라티는 불완전한 자아인가. 여기에 대해 <존 말코비치 되기>는 파격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영화의 결말에서 볼 수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본작은 순환적 내러티브를 가진다. 레스터 교수는 말코비치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새로운 육체로 들어가려고 하는 점에서도 볼 수 있다. 허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순환 구조는 크레이그의 결말에 있다. 크레이그는 자정이 넘어 포탈을 지났기에 맥신과 라티의 딸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평생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졌다. 허나 크레이그는 여전히 맥신을 사랑하기에 딸의 무의식에서 계속해서 구애를 외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크레이그의 사랑이 외면적으로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어찌 됐든 핵심은 크레이그의 무의식으로서의 사랑이 곧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모든 형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모든 자아가 여자아이의 의식 속에 갇힌 무의식으로서의 크레이그와 동일하다는 암시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아기가 부모에게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자 성장 과정인데,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설명해낸 <존 말코비치 되기>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크레이그와 같은 꼴이라고 말해버린다. 우리의 눈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무의식은 같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과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자. 영화는 크레이그의 인형극으로 시작하고, 나중에 같은 인형극이 말코비치의 육체 속에서 재현된다. 이때 (말코비치 속) 크레이그는 이 인형극의 제목이 ‘크레이그의 절망과 환멸의 춤’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인형극은 한 인형이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절망에 빠지는 내용인데, 이때의 감정은 거울에서 비롯된다. 거울이란 스스로를 인식하게 해주는 도구이므로, 인형은 거울을 보고 자신이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각해 절망과 환멸에 빠진 것이다. 이후 인형이 자신의 몸에 걸린 줄을 보고, 그 위 자신을 조종하는 인형사를 보는 부분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이 더욱 눈에 띠게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인형극이 반복되면서 의미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나왔던 이 인형극은 단순히 인형의 절망과 환멸을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후 말코비치의 육체를 조종하며 크레이그가 선보인 이 인형극은 인형을 인간의 모습으로 치환시킨다. 의미가 한층 더 깊어지는 것이다. 이후 이 인형극에서 인형이 거울을 보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이후 반복된다. 말코비치는 그 짧은 순간 거울을 보며 드디어 자신의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며 자유를 느끼지만, 곧바로 레스터 박사와 친구들에게 다시 침입당한다. 이때에는 인형극은 심지어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인형이 인형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순간 자각할 수 있을 지언정 그를 자유라고 인식하고, 실상 그 자각마저 소실되고 만다. 인형극 자체조차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비롯하여 모든 무의식과 의식의 간극이 어린아이 속 크레이그와 같은 꼴로 설명하려는 찰리 카우프만의 시도는 (정신분석학적으로의 의의를 지니지 못할지언정)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예술적이다.
이러한 카우프만의 대담하고 발칙한 담론은 사랑으로서 결말을 맺는다. 바로 라티와 맥신, 특히 라티의 이야기이다. 엘라이자와 탐탐 등 라티와 함께 살고있는 여러 동물들은 모두 라티의 파편들이다. 라티가 크레이그에 의해 우리 속에 갇힐 때의 대사는 라티가 이전에 앵무새에게 가르쳐준 대사와 같으며, 엘라이자와 같은 우리에 갇혀있는 이미지는 곧 둘이 동일한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그리고 작중에서 진정한 자가구원과 성장을 맺는 것은 엘라이자이므로, <존 말코비치 되기>의 블랙 코미디 속 라티는 유일한 긍정적 인간상이 되어보인다. 이러한 지점은 영화 전반을 통틀어 산개해있는 ‘맥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있다. 맥신은 말코비치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라티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였고, 이후에는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육체 안에 들어있을 때 맥신은 크레이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였다. 허나 맥신은 분명히 크레이그나 말코비치를 사랑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맥신은 라티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라티를 유일하게 사랑했던 것이다.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를 파국 속에서 라티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라티를 이상향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보이지만, 말코비치 포탈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인식하고 욕망을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한 라티는 작중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찰리 카우프만의 <존 말코비치 되기> 각본은 프로이트적 해석을 기반으로,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존재 일반에 관한 비범한 관찰과 상상력의 결정체이다. 말코비치가 말코비치 포탈을 통과했을 때의 표현이라던지, 크레이그의 결말에서 암시하는 확장성은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이다. 어쩌면 예술이 가져야 할 여러가지의 본모습 중 하나를 거칠게 보여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서술의 모호함이나 난해한 설정이 감상을 흐릴 수는 있으나, 이마저도 블랙 코미디적 코드로 풀어내어 비완결적인, 그러므로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예술을 창조해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진: https://www.imdb.com/title/tt0120601/mediaviewer/rm1204366336?ref_=ttmi_mi_all_sf_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