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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Kim Jan 27. 2022

나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의자 하나가 내 마음속에 놓여 있었다. 어른들이 말하길, 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서로 다른 세 존재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나 자신, 또 하나는 악마, 마지막은 선한 신.


누가 의자에 앉느냐에 따라 내 삶의 주체가 달라지게 되는데, 악마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이 앉게 되더라도 나약한 나는 악마의 거센 공격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선한 신에게 삶의 주인 자리를 내드렸을 때 비로소 내 삶은 안정을 찾고 올바른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교훈의 이야기였다.


20대까지 나는 이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맞닥트리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나는 늘 내 마음속 의자를 떠올리며 처절한 자기 검열을 해왔다. '완벽하고 선한 신에게 의자를 내어드렸더라면 이런 문제가 일어날 리 없었을 텐데, 내 의지로 판단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반성하고 후회했다. 스스로 선택하기를 주저하고 늘 신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여러 성취들은 전부 신의 은총이라고 믿었고, 그 밖의 모든 갈등과 문제들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리며 자학했다.


하지만 정작 선한 신이 내 삶을 인도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은 다시,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신의 말씀이 담긴 경전'과 '종교 지도자의 설교'라고 가르쳐주었다. 경전을 해석 설교를 삶의 지표이자 판단의 근거로 삼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실체 없는 이념과 타인의 말을 수많은 선택의 기준로 삼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이성과 판단능력에 대한 확신은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마음속 의자를 신에게 내어드리는 방법이라 굳게 믿었다.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자 견고했던 의자 이야기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눈이 넓어지면서 용기를 내어 의자에 앉아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서툴지만 스스로 고민해보고, 선택을 내리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다. 여전히 불안하고 죄책감이 들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신의 도움 없이도 어떻게든 살아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아들이 태어난 일이었다.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바라보고 있으면 내 삶에 그어진 선 넘어 그 어딘가에까지 생각이 미치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난 내 삶의 방식이 옳았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는 내 삶에 이루어낸 것이 너무 적었다. 무엇보다 자기혐오에 빠져있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다.


 '어쩌면 의자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닐까?.'


나와 가장 가까운 어른은 부모님이었다. 내게 의자 이야기를 들려준 장본인이자 산 증인이셨다. 종교 지도자의 말을 듣고 직업도 내버리고 종교에 귀의한 삶을 사셨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전 재산마저도 몽땅 종교 지도자들에게 시고는 노년을 가난과 질병 속에 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신의 뜻을 따라 살고 계신다고 자부하셨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런 삶의 방식이 옳았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기에 옳아야만 했다.


부모님은 나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어떻게든 원래 알고 있던 순종적인 자식으로 되돌리려 노력하셨다. 설득이 안 통하자 강요와 협박도 이어졌다.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자고 먼저 제안하셨다. 남이 되던 그날 밤, '삶의 주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내 절규에 어머니는 '그렇게 자아가 강해서야 악마에게 삶을 내주고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악담으로 답하셨다.





결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었던 내 인생을 회복하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나 자신이 주인 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고장 난 부분을 하나씩 뜯어고쳐나갔다.


나는 우선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바라는 일'보다는 '바람직한 일'을,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보다는 '좋은 일'을 해오며 살아왔다. 궁금했다. 내가 정말로 바라고,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헤밍웨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마찬가지로 '좋은 인생'도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고르게 균형을 이루어낸다면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인생 바퀴(wheel of life)'라는 개념을 적용해보면 삶은 다음 10가지 영역이 고르게 발달했을 때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


(1) 성장 & 배움(Growth & Learning)

(2) 영성(Spirituality)

(3) 돈 & 재정(Money & Finance)

(4) 직업 & 일(Career & Work)

(5) 건강 & 운동(Health & Fitness)

(6) 재미 & 취미(Fun & Recreation))

(7) 환경(Environment)

(8) 사회적 관계(Community)

(9) 가족 & 친구(Family & Friends)

(10) 배우자 & 사랑(Partner & Love)


인생 바퀴(Wheel of Life)


지나친 종교 편향성 때문에 지금까지 내 인생의 10가지 영역에는 결핍되어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다시 균형을 되찾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들을 세워나갔다. 그렇게 세운 목표들을 다시 월, 주, 일 단위로 세분화하여 매일의 내 삶 속에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스스로 기준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외부의 이념을 기준 삼아 살 때 나는 작고 초라한 존재였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의 기준들을 세워나가자 나는 비로소 존엄하고 능동적이며 아름다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내가 가진 수많은 결핍들이 오히려 성장을 향한 갈망으로 변했다.


정말로 그랬다. 가난했던 과거는 경제적 자유를 꿈꾸며 투자자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경험 덕분에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려고 더욱 노력 중이다. 종교에 빠져 지냈던 경험 덕분에 지금은 매사에 과학적, 합리적 태도를 갖추려고 애쓴다. 편향된 이념을 경계하고 늘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소하고 허약한 몸에 대한 결핍은 꾸준히 운동하고 건강을 챙기는 동력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살고 싶은 인생을 이렇게 한 줄로 정의 내렸다.

결핍 덩어리가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과 연을 끊어가면서까지 과거와 작별했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상처 입은 내면 아이는 수시로 울음을 터뜨리곤 해서 성장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 의자를 내어줄 때가 종종 있다. 비판 없이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SNS 따위로 허비하거나, 직장이나 가정에서 맡은 역할은 최선을 다하면서 정작 나를 위한 일들은 뒤로 미루거나, 지식을 습득하되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재창조해내기를 게을리하거나,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실제로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럼에도 마음속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 칠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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