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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Feb 23. 2022

조금 이른 임신 마지막 달(32~36주)

나의 첫 임신 이야기

보통은 막달이라고 부르는 35주나 36주가 넘어가면 ‘막달 검사’라고 부르는 혈액검사와 흉부 X-ray 검사, 소변검사를 시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치태반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37주에 수술 날짜를 잡았던 나는 수술 전 검사를 조금 일찍 시행하기로 했다. 32주에 수술 전 검사를 미리 시행하고 33주에 정기검진을 하면서 마취과 진료까지 한꺼번에 보기로 했다. 나에게는 32주부터 36주까지가 임신 막달이었던 셈이다. 큰 문제없이 수술을 들어가기 위해서, 33주 정기 검진 날이 오기 전 토요일 아침에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 소변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했다. 임신 중에는 엑스레이 검사가 불가능하지만, 태아 부분을 차폐막으로 가리고 흉부만 보는 검사를 한다. 전치태반은 다른 제왕절개술보다 출혈 위험이 높기 때문에, 혈액 검사에서 중요한 것은 적혈구와 빈혈 수치, 혈액 응고를 담당하는 응고인자 검사 등이 있었다. 33주 정기 검진에서 결과를 들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수술에 문제가 되거나 위험해 보이는 부분은 없다고 하셨다. 다만 태반 위치를 고려했을 때 수술 중 출혈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어서 철분제를 잘 챙겨 먹을 것을 거듭 당부하셨다. 수술 중 마취를 결정하는 마취과 외래에서는 제왕절개술은 기본적으로 척추마취로 진행된다고 설명을 들었다. 다만, 나는 보통 척추마취를 시행하는 위치에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았던 적이 있어서 걱정했지만, 그런 사람을 많이 보는 병원이라서 그런지 아마 척추마취 진행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수술까지는 아직 한 달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수술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고 아기는 어느새 1.9kg까지 자라서 제법 통통해진 볼살을 볼 수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출산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제법 신생아에 가깝게 변해가는 아기를 보면 기쁘기도 했다.


임신 후반부가 되면 일주일마다 상태가 많이 변한다고들 한다. 사실 배가 나오고 아기의 몸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예정된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겪어보다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33주를 지나 34주 0일이 되자마자 임신 초기보다도 참을 수 없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낮 12시가 될 때까지 신나게 늦잠을 자고도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잤고, 저녁을 먹고 나면 8시나 9시부터 잠이 와서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이외에도 자꾸 멍해지거나 눈이 침침한 듯 잠시 동안 흐리게 보이는 현상도 일어났는데, 잠시 된장찌개에 넣을 감자를 깎다가 시야가 흐리면서 감자칼에 손을 베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찾아오던 가진통의 세기가 이제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가끔 새벽에 배가 생리통처럼 사르르 아프다가도 금방 잊을만한 수준이 되어 다시 잠들 수 있는 수준의 가진통이었다. 그러나 34주가 되어 저녁에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심하게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어 무섭기도 했지만, 34주면 아직 출산을 하기에 너무 이르기 때문에 좀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며 참기 시작했다. 30분째가 되어 병원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 극적으로 고통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시 이런 증상이 생기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니 분만장에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날 밤은 조금만 배가 아파와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임신 마지막 달이 되면서, 코로나19와 관련된 방역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 방역 패스가 시행되면서 백신을 접종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 반경이 좁아졌다. 임신 안정기가 오면 코로나 백신을 맞으려던 나의 계획은, 자궁 관련 출혈을 부작용으로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 관계로 미뤄졌다. 전치태반인 나의 경우, 자궁 내 출혈이 시작될 경우 나는 물론 아이도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코로나에 걸릴 경우에도 굉장히 위험하지만, 백신 접종의 경우 엄마의 선택이라며 접종이나 미접종을 강력하게 권유하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출산 후에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백신을 맞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임신 막달에는 자주 가던 집 앞 카페조차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물론 1인은 이용이 가능했지만, 주말에 남편과 오붓하게 가지던 티타임조차 집에서 가져야만 했다. 물론 코로나에 걸리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트, 백화점, 카페, 식당 이용이 모두 불가능한 임신 막달이 되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면 더욱 밖에 나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 부부의 오붓한 데이트를 더 즐겨둘 걸, 하는 후회가 남았다.


내 후회나 생각과는 관계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35주부터는 매주 검진을 받으러 가야 했다. 33주에 봤던 아기는 35주에 2.4kg으로 빠르게 자라고 있었고, 동그란 모양으로 아기의 배도 꽤 커져 있었다. 이제는 남편이 퇴근하고 가만히 내 배에 귀를 기울이면 아기의 빠른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볼살이 꽤 통통해져서 한 번 만져보고 싶은 모양이 되어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초음파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아기가 아무래도 나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3주부터 조금씩 사모으던 아기 용품과 출산에 필요한 용품을 이제는 주섬 주섬 가방에 담아야 할 시기가 왔다. 아기도 커지고, 주수가 차면서 수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복부 통증이 시작되면 그 전에라도 입원하고 출산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기가 왔다. 교수님은 이제 언제라도 통증이 시작되면 아기를 꺼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진통이 시작되어버려서 자궁이 수축하면 엄청나게 출혈이 시작되면서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든 아프면 바로 병원에 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는 비워두었던 캐리어를 열고, 던져두었던 출산 준비물 리스트를 꺼내 하나씩 차곡차곡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기 물건보다 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 많았고, 나도 출산은 처음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 물건을 쓸지 아닐지도 몰라 무엇을 위에 두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작은 캐리어를 꺼내서 싸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큰 캐리어를 꺼내고 결국 장 볼 때나 쓰는 커다란 타포린 백까지 꺼내야 했다. 이것저것 넣다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은 인터넷 쇼핑을 하기도 했고, 가끔 새벽에 배가 아프면 싸다 만 가방을 바라보며 이 통증이 심해지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35주였다.


남들보다 위험한 출산을 준비하던 나에게는 남들과 다른 수술 준비를 한 가지 해야 했다. 병원에서 먼저 권하지는 않았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동기와 후배들이 많던 나에게 들려온 정보에 따른 준비였다. 그건 바로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헌혈 인구가 줄어들어 병원 내 혈액 수급이 어렵다는 정보였다. 전치태반은 원래도 제왕절개 수술을 할 때 헌혈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완전 전치태반이기도 하고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 들어서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상급종합병원 병동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큰 병원에서도 혈액이 모자라서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헌혈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교수님도 수혈량을 먼저 예측하기 어렵고, 출혈이 시작되면 1-2팩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은 혈액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33주에 혹시 지정헌혈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 여쭤봤을 때 교수님은 화색을 띄며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최소 1-2명 정도의 헌혈을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코로나19 이후 이제까지 혈액이 없어서 헌혈을 해주지 못한 일은 없었지만, 아슬아슬했던 상황은 몇 번이나 있었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36주가 될 때까지, 나와 혈액형이 같은 지인들을 알아보고 지정 헌혈을 부탁했다. 지정 헌혈은 혈액이 필요한 환자에게 헌혈한 피를 바로 보내는 제도인데, 수술 일주일 전까지 전국 어디에서든 내가 수술할 병원으로 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지정 헌혈의 경우, 헌혈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4촌까지의 가족은 헌혈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부인 관계로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남편이나 직계가족도 4촌까지는 헌혈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헌혈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고 싶다고 모든 사람이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주기적으로 출혈을 반복하는 여자들의 경우, 필요한 날짜에 맞춰 헌혈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간호대, 병원을 다녔던 나는 대부분의 친구가 여자였고, 헌혈을 직접 부탁하기가 미안하고 힘들었다. 다행히 내 어려움을 들은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지인과 남자 친구들을 설득해서 지정 헌혈자를 3명이나 구해주었다. 남편 친구 중에서도 나와 혈액형이 같은 지원자가 있었지만, 헌혈 전 검사에서 간수치가 높게 나와 헌혈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부모님 지인, 지인의 지인 등 지원자가 있었지만 출국을 앞두고 있거나 복용하던 약 때문에 헌혈이 어려웠다.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남인 나를 위해 헌혈을 해주기로 결정한 마음들이 참 감사했다. 아기와 내가 세상에서 무사히 만나기 위해 그런 따뜻함과 사랑이 필요했고, 나도 아기도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나는 출산의 고통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은데, 드디어 마지막 외래인 36주가 오고 말았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아기를 만난다는 것은 설레고 좋았지만, 얼마나 아프고 회복 과정이 힘들지 생각하면 일주일이 최대한 천천히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점점 무거워지는 배와 무너지는 체력에 아기를 만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아기가 뱃속에서 발을 차면 억, 소리가 날 만큼 갈비뼈가 아파왔고 밤에는 3시간을 채 자지 못하고 깼다. 바디필로우를 양쪽에 두고 몸을 기대도, 아무리 자세를 바꿔도 어깨나 골반, 허리가 아파서 잘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온몸의 관절이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파 왔다. 30주부터 뒤뚱뒤뚱 걸어야만 했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낮이든 밤이든 피로에 시달렸다. 마지막 외래에서 아기는 2.7kg가 되었고 교수님은 이제부터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집안일도 하지 말고 무사히 일주일을 보내고 오라고 하셨다. 남편은 이제 집에 올 아가를 생각하며 평소와 다르게 집을 열심히 청소했고, 주변 사람들이 보내준 아기 물건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닦아두었다. 나는 미리 싸 둔 출산 가방 안의 물건들을 남편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내 몸이 불편할 경우 스스로 물건을 꺼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곡차곡 쌓아온 37주간의 시간처럼 꾹꾹 눌러 담은 출산 가방을 닫으며, 나는 임신부로서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둘만의 가정이 세 명의 가정으로 변모할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아기 침대에 깨끗한 빨래 냄새가 나는 이불을 깔면서, 작디작은 베개를 두면서 나와 남편은 엄마와 아빠가 된다는 설렘으로 임신 막달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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