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주간일기
비 소식이 끊이지 않던 요즘, 코로나 환자도 다시 늘어나면서 일정의 변동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 주는 가능한 멀리 가지 않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놀 계획이었다. 이번 주 수요일에도 평소에 자주 보지 못하는 친한 부부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화요일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함께 일하는 분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당사자는 음성이긴 했지만, 아기와 함께 만나는 약속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을 취소했다.
비는 내리고, 긴 휴가를 받은 남편과 집에서 번갈아가며 아기 눈높이의 바닥을 굴러다니며 열심히 놀다 보니 충동적으로 호캉스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가끔 유튜브로 호텔 리뷰 같은 영상을 찾아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곤 했는데, 우리 동네에 있다는 가성비 호텔이 갑자기 생각났다. 야외 테라스와 야외 욕조가 있는 호텔 방인데 그다지 비싸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리 동네라도 가성비로 알음알음 소문이 난 곳이다 보니 갑작스럽게 남편이 시간이 나는 주말에는 예약이 어려운 방이었다.
그렇게 화요일 저녁에 갑자기 들어가 보니, 비 소식 때문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테라스 방이 남아있었던 데다가 할인율도 높았다. 조그만 욕조를 둔 곳도 풀빌라라고 30만 원대 이상의 가격이 흔한데, 이 방은 10만 원대 초반이었다. 하루 전 예약이라 환불도 안되는데, 그런 곳이라면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아기와 첫 물놀이를 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 남편과 짧은 상의 끝에 호텔을 덜컥 예약해버렸다. 리뷰를 찾아보다 보니 아무리 우리만 쓰는 방이지만 욕조가 야외에 있어서, 주변 건물에서 보일까 봐 알몸으로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우리 부부야 좀 살이 쪘어도 이전에 쓰던 수영복을 대충 입으면 될 것 같았는데, 아기는 신생아 때 사뒀던 방수 기저귀만 채우기가 좀 미안했다. 그래서 근처 아기 옷을 파는 곳에 5개월 아기에게 맞는 수영복이 있는지 문의했으나, 큰 사이즈 수영복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사야만 낫는 병이 있다. 아기의 첫 수영이자 외부 물놀이인데, 작아서 터질 것 같은 방수 기저귀만 입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값을 다 주고 아기 수영복을 사기 위해 아기 옷 매장들을 다 돌기에는 시간도 없고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육아인들의 필수 어플인 당근을 켜고 적당한 수영복이 있는지 물색했다. 다행히 아기에 비해 사이즈가 작아서 수영복을 판매하는 사람을 바로 찾았고, 아기에게 바로 입힐 수 있게 세탁까지 해둔 상태의 좋은 수영복을 적당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난주에 한번 싸 봤다고 아기와의 외박 짐을 싸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호텔도 당근 판매자도 모두 다 동네 안이였기 때문에, 우리는 호텔에 가는 길에 아기 수영복을 찾아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는 비가 내렸고, 재난 문자로 호우주의보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이미 물놀이를 하기로 결정한 김에 비가 좀 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따뜻한 물을 받아도 비를 맞으며 아기와 물놀이도 해도 되는지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앙증맞은 수영복을 손에 쥐고 말았고, 우리는 비가 잦아드는 때를 노려 어떻게든 물놀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도착한 호텔은 매우 한적했다. 야외 테라스가 딸린 우리 방은 꼭대기층이었고, 사방이 막혀있긴 했지만 무려 루프탑 테라스였다. 지어진 지 오래됐는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시설도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깨끗했고, 아기 침대도 무료로 빌려줬다. 사실 비가 와도 집에서 10분 거리라 짐을 적당히 챙겼고, 젖병은 다음날 아침 집에 가서 씻어도 충분했기 때문에 아기 침대만 있어도 지낼 만했다. 소리에 예민한 아기와 코를 심하게 고는 남편 사이에 끼어 한 방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충동적인 결정에 그 정도 고통은 감내하기로 했다.
테라스 쪽으로 난 길쭉한 창문에 비가 내리고, 바닥에 물이 튀기는 모습을 보며 클래식을 틀어놓으니 멀리 여행을 온 느낌이 났다. 낯설었는지 안아달라고 보채던 아기도 창문 앞에 앉아있으니 비 오는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생각해보니 비가 오면 집에서만 놀았기 때문에 바닥에 물이 튀기도록 비가 오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흐르는 모습을 우리 아기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창문에 붙은 물방울들을 만지려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비가 와도 행복했다.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기에 앞서, 아기도 어른들도 식사 시간을 가졌다. 주변에 상가가 많아서, 메뉴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다. 물론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는 아기 먼저 따뜻한 분유 라떼를 먹었고, 남편이 나가서 비 오는 날에 땡기는 파전과 국밥을 사들고 들어왔다. 고요한 분위기에 아기를 위한 클래식과 빗소리가 흐르고, 따뜻한 파전과 국밥을 먹으며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
어른들도 아기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드디어 테라스 나들이를 나섰다. 미리 욕조를 한 번 헹구고 따뜻한 물을 받으며 보니, 절반 정도 지붕이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면 비를 많이 맞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웠는데, 비가 오니 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뜨끈한 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잘 어울렸다. 아기가 아직 5개월이라 지난주에 찬물 수영장은 포기했는데, 우리만 쓰는 욕조에 아기가 평소 즐기던 목욕물 온도에 맞춰 물놀이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기는 처음으로 비 오는 야외를 보는 것도 낯설고, 밖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도 처음이라 긴장했는지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하지만 곧 엄마 아빠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손으로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다리도 휘적휘적 저으며 물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놀이를 하는 중에 스콜처럼 큰 비가 쏟아지자 떨어지는 물을 보느라 바쁘게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점점 신이 나는지 방긋방긋 웃기도 했다.
요즘 우리 가족이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순간들이 있는데, 나에겐 이 순간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비가 시원하게 오는 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물에 노곤해진 기분인데 남편을 똑 닮은 딸이 남편 품에 안겨서 물장구를 치다가 나를 보며 웃어주는 순간의 행복은 전혀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문장으로 그 순간의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어, 남편에게 그저 내가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는 말과 행복하다는 감상을 남겼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의 기분을 안다고 한다. 표정과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와 연결된 것처럼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한다고 한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호캉스지만 내내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하며 행복을 느끼는 엄마 때문이었는지, 아기는 45분이나 계속된 물놀이에도 함께 즐거워했다. 우리는 충분히 물놀이를 즐긴 후, 챙겨 온 아기 욕조에 아기를 씻겼다. 물놀이가 체력을 많이 방전시킨 모양인지 아기는 낮잠도 밤잠도 생각보다 잘 자주 었다. 아기도 물놀이를 하면 배가 고파지는 건 어른과 같은지 예상보다 분유도 자주 많이 먹었다.
지난주에도 느꼈지만, 여행을 왔어도 아기는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다. 덕분에 여행만 가면 퇴실 시간까지 자는 우리 부부도 일찍 일어나 아기 맘마 시간을 챙기고 천천히 짐을 쌌다. 아침에는 어느새 비가 개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아침의 빛이 쏟아지는 테라스를 아기와 함께 천천히 산책하고 방을 나섰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계획하진 않았던 데다 짐도 아무렇게나 싸서 왔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물놀이를 한 기분이었다. 아기의 귀여운 수영복 사진과 영상도 엄청 많이 찍어뒀는데, 볼 때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남편과 종종 이런 충동적인 호캉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웃으며 집으로 왔다. 오가는 길이 짧으니 아기와 우리도 지치지 않아 더 좋았던 것 같다. 이번 주의 행복한 순간, 꼭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