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병원에 입원해서 출산하고 퇴원하기까지의 과정을 꽤 자세하게 묘사할 예정이며, 다른 때보다 글이 길고 다양한 고통에 대해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출산의 고통을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이라면 나중에 읽기를 권한다. 임신을 처음 확인했던 임신 5주 0일부터 수술 날짜였던 37주 2일까지, 약 32주 2일간 수많은 몸과 마음의 변화를 거쳐 출산의 그날이 다가왔다. 전치태반이라 남들처럼 38주가 넘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진통이라도 오면 출혈 위험이 컸기 때문에 나에겐 출산 날짜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아기의 발달이 완전해질 때까지 최대한 기다릴 수 있는 마지노선이 37주였고, 주말을 지나 수술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에 아기를 만나기로 했다. 그 전에라도 진통이 오면 응급으로 아기를 꺼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졸이며 가진통이 올 때마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라’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수술 전날이 찾아왔고, 병원 원무과에서 드디어 입원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외래를 다니고 아기 초음파를 보러 설렘을 안고 찾아왔던 병원이었는데, 막상 입원하러 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커다란 캐리어에 필요한지 아닌지도 모르는 짐을 잔뜩 가지고 병동으로 가서 환자 팔찌를 차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항생제 알레르기 반응 검사를 하고, 양 팔목에 가장 두꺼운 바늘을 하나씩 잡고 나자 정말 내일 아침이면 수술을 한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수술 진행과정을 교과서로도 보고 심지어 수술 현장에도 그렇게 많이 들어가 봤는데, 내가 거기 누워있는 산모가 된다는 것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는 계속해서 내 뱃속에서 움직였는데, 이제는 이 느낌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아쉬웠다. 그동안 새벽에 발로 찰 때마다 아프고 힘들었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이상했다. 저녁이 되자 분만장에 가서 태동 검사와 아기 위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초음파를 봤는데,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던 아기가 180도 위치를 바꾸어 엉덩이를 아래로 내밀고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어차피 내일 수술이기 때문에 아기 위치가 상관없다고 했지만, 태반 위치도 수술하기 안 좋은 상황에 일주일 만에 아기까지 둔위가 되었다고 하니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수술에 들어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시니 믿고, 이제 와서 불안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병실로 돌아가서 다음 날 수술을 위해 푹 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날 밤엔 잠이 오지 않았고, 2-3시간마다 깨서 시계를 보면서 낯선 병실에서의 밤을 보냈다.
수술 날의 아침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나는 두 번째 수술로 예정되어 있었고 10시경 수술을 예상했는데 9시가 되자마자 분만장에서 호출이 왔다. 분만장에 가서 수술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방적 항생제를 맞고, 수혈을 위해 잡아놓은 주사부위가 망가져서 급하게 새로 혈관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수술대 위에 누우니 이제부터는 정말로 무서워졌다. 마취과 선생님들이 먼저 들어왔고, 척추마취를 위해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렸다. 외래에서 말씀하시기로는, 허리 디스크가 있어도 척추 마취를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전공의 선생님이 3번을 찌르고도 실패해서 결국 옆에서 보시던 교수님이 3번을 찔러 6번째 만에 척추 마취에 성공했다. 5번을 찔리는 동안 허리가 찌릿하거나 다리, 발이 찌릿해서 이 정도면 수면마취를 해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추후 회복이나 아기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척추 마취를 하는 것이 좋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차마 재워달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발끝부터 뜨거운 느낌이 서서히 나면서 명치까지 마취가 시작되었다. 포비돈으로 배를 소독하는 동안 천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 출혈이 많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혈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해 동맥 혈관 라인까지 잡았다. 다행히 동맥 라인을 한 번에 잡았지만, 부분 마취를 하고도 정맥 혈관 잡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양팔을 십자가처럼 벌리고, 마취 확인을 하는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며 정신이 하나도 없는 수술 준비를 마칠 때쯤 드디어 담당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여기저기 아프고 정신없고 불안하고 무서워 죽겠는데 마취과와 산과 교수님이 하는 말에 대답하느라 나는 불편을 드러낼 틈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부러 내가 두려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말을 걸어오신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교수님의 사인과 함께 수술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맨 정신으로 수술이 끝날 때까지 버틸 자신은 없어서 미리 마취과에 아기가 나오고 나면 재워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다. 그래서 조금만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통각은 없지만 배가 흔들거리고 매우 당기는 생소한 느낌이 나더니 금방 아기가 나왔다.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아기는 다행히 입에서 양수를 빼주기 전부터 맹렬하게 잘 울었다. 아기를 처치대에 올려 몸무게를 재고, 입과 코에서 양수를 빼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만큼은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너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 초록색 포에 싸진 아기가 멀리서 다가왔다. 태지가 잔뜩 묻은 얼굴이었지만 그 와중에 나를 좀 닮은 것 같은 아기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적절할지 모르겠다. 드디어 만났다는 반가움인지, 그동안 고생했던 아기와 나에 대한 연민인지, 처음으로 내 아기를 만난 감격인지. 양팔이 묶인 나는 아기를 만져볼 수도 없었고, 아기는 금방 신생아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아기 발도장을 찍고 내 지장을 찍은 후 아기와 나에게 같은 분홍색 팔찌를 하나씩 채워주셨다.
이제부터는 기억이 없어야 하는 영역인데, 아기를 보내고 나자 마취과 교수님이 내게 수면유도제 주사를 놓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산과 교수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전공의들에게 출혈을 잡으라고 지시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분명 잠이 조금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후처치를 하는 내내 소리가 다 들렸다. 눈은 감고 있었고, 배에 느낌도 별로 없었지만 혈압이 떨어진다고 하는 소리, 피를 더 가져오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 약을 더 추가하라고 하는 소리, 지혈을 위해 다른 부위를 더 잘 잡으라고 지시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때 수술장에서 내 시야를 가렸던 천을 내리고 있었는데, 수술장 조명까지 튀어있는 혈액을 보며 내가 들은 것이 헛것이 아니라 진짜 나의 출혈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옮겨진 곳은 회복실이었고, 곧 남편이 들어왔다. 코로나라 남편이 수술 중에 탯줄을 자르는 일도 할 수 없었고, 분만장 밖에서 아기만 잠깐 만났다고 했다. 다른 산모보다 수술 시간이 길어지는 나 때문에 남편은 아기를 만난 것에 대한 감격도 제대로 누릴 수 없었고, 아기에 대한 설명만 듣고 내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아서 불안함이 너무 컸다고 했다. 모든 소리를 듣고 기억하는 나는 회복실에서 남편 얼굴을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신선동결혈장 3개를 든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서 급하게 내게 수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남편에게 감동적인 멘트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추워’였다. 정말이지 너무 추웠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고, 내가 춥다고 하자 간호사 선생님들이 이불 밑으로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워머를 켜주셨다. 남편은 계속해서 나에게 ‘고생했어’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남편도 밖에서 다급하게 피를 더 가져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날 무렵 교수님이 나와서 예상보다 출혈이 많아서 잡는데 시간이 걸렸고, 수혈도 많이 했지만 자궁 내 풍선술까지 시행해서 겨우 자궁 내 출혈은 잡았고 수술을 잘 마쳤다는 설명을 해주셨다고 했다. 다 잘 끝났다고 안심하려는 순간부터, 조금씩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픈 게 너무 무섭고 싫었던 나는 무통주사는 물론이고 페인버스터(수술 부위에 직접 들어가는 진통제)까지 달고 있었지만, 그런 약들이 통증을 아예 없애줄 수는 없었다. 아랫배부터 싸르르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나는 다급하게 무통주사 버튼을 찾았다. 그렇지만 손에 하도 달고 있는 주사가 많아서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아플 때마다 남편이 무통주사 버튼마저 대리로 눌러주면서 회복실에서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로 돌아간 순간부터, 퇴원하는 순간까지 돌이켜보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나와 남편은 많은 고민 끝에 상급종합병원의 어마어마한 1인실 병실료를 감수하고 1인실을 선택했다. 일단은 입원 기간이 5박 6일로 정해져 있었고, 인생에 어쩌면 한 번일지도 모르는 일인 데다 남들보다 위험한 수술을 하는 만큼 회복기간 동안 나의 존엄성과 편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남편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남들보다 심한 코골이가 다인실 병실에서 다른 산모들의 회복을 크게 방해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1인실에서 수술 후의 다른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 모든 일을 그나마 1인실에서 우리끼리 겪어서 병실료가 아깝지는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쨌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늘어져있는 몸이 수술 직후 병실 침대로 여러 사람의 손을 통해 옮겨졌다. 담당 간호사뿐 아니라 수간호사님까지 와서 내 수많은 라인들을 정리했다. 정신이 너무 없고 느껴지는 것은 통증뿐이었는데 수간호사님이 커튼을 좀 열어보라고, 아기 탄생을 축복하듯 눈이 온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들이 모두 나간 뒤에 남편이 열어준 커튼 사이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우리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해주는 신호 같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척추마취는 병실로 돌아온 후 8시간 동안 물 포함 금식과 절대 안정이기 때문에 자세조차 바꿀 수 없어 그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참기 힘든 복부 통증과 갈증이 시작되었다. 무통주사를 아무리 눌러도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고통이 진통처럼 주기적으로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통증 강도가 점점 커져서 0-10 사이에서 9점 정도라고 생각했을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추가 진통제를 요청했다. 분명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주치의에게 알리고, 주치의가 다시 오더를 내리고 약을 주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걸 달아주기까지의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진통제를 달고 나자 다시 견딜만한(이렇게 썼지만 살면서 겪은 가장 심한 생리통 정도의 강도로 6-7점 정도의 고통) 고통으로 강도가 내려갔다. 6시간 후에나 다시 요청할 수 있는 그 진통제는 마약성 진통제였다. 나는 금식이 끝나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걸을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해보면서 걸어야 할 때 다시 진통제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겨울의 병원은 작은 가습기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나도 건조했고, 복부의 통증 외에도 바짝 마르는 입과 코가 나를 너무 괴롭게 했다. 물까지 금식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거즈에 물을 묻혀 입에 물고서 그 물을 삼키지 않고 호흡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거즈를 잘 적셔서 입에 넣어도 1시간이 지나면 다시 입과 거즈가 바짝 마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복부의 통증과 마르는 입 때문에 1시간에 한 번씩 남편을 불렀고, 남편도 쉬지 못하고 8시간이 흐를 때까지 내 곁을 지켰다.
그 생소하고 엄청난 고통을 잠시나마 잊었던 것은 하루에 두 번 있는 신생아실 면회 시간 덕분이었다. 나는 걸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기에 남편이 혼자 가서 사진과 동영상을 잔뜩 찍어왔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마다 그 사진과 동영상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내 직장에도 남편이 대신 연락을 해주었고, 아기가 보고 싶을 때도 남편이 내 눈앞에 사진과 영상을 틀어주었다. 드디어 힘든 8시간이 지나고, 그토록 기다렸던 금식 해제 시간이 찾아왔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지만 목이 너무 말랐고, 겨우 침대 상체 부분을 조금 올려서 구부러진 빨대로 미친 듯이 물을 마셨다. 곧이어 늦은 저녁으로 미음과 미역국이 들어왔지만 아무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온음료와 물만 연달아 마셨다. 그리고 그날 밤은 거의 고통과의 씨름이었다. 끙끙대며 앓는 나 때문에 남편은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며 ‘차라리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고, 이미 추가 진통제 찬스도 써버린 후였기 때문에 나는 거의 자다 깨다를 1시간마다 반복하며 아침이 와서 새로운 진통제를 요청할 수 있기만을 기다렸다. 새벽의 밝은 하늘을 보며 나는 드디어 아침이 와서 자궁 내 풍선 카테터와 소변줄을 뗀다는 기쁨, 수술 후 처음 일어서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는 두려움을 함께 마주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소변줄을 떼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일어나서 몸무게도 재야 한다고 했는데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너무 힘든 일이었다. 다른 제왕절개 후기에서 예습했던 것처럼 내장이 쏟아지는 느낌이나 배가 불타는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무통주사와 페인버스터의 힘이었는지,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더욱 이상한 증상이 있었다. 몸을 일으켜서 앉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너무 아프고 어지러워서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담당 간호사는 계속 들어와서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화장실을 가야 한다, 몸무게를 재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게 너무 어려운 미션처럼 느껴졌다. 물론 제왕절개 후 24시간 내에 고통스럽더라도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걷는 것이 산모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수많은 연구결과에 의한 치료 방침이 있기 때문에 그 독촉을 이해는 했지만, 당장 내 몸이 그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다. 결국 8시간 단위로 나의 모든 수분 섭취량과 배설량을 체크하던 담당 간호사는 내 몸의 배출량이 심각하게 적고 몸이 너무 붓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를 힘으로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 느낌도 없었지만 나도 수분 배출량이 너무 적다는 의견에 동의했고, 억지로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너무 어지럽고 힘들어서 거의 남편에게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남편에게 내 소변량을 체크하도록 하는 것과 혼자서 옷도 추스르지 못해 모든 과정을 맡겨야 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수치스럽고 미안했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몸 상태와 점점 아프고 힘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그런 수치심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남편도 너무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몸무게를 꼭 지금 재야만 하냐고 했지만, 담당 간호사의 단호함에 나는 억지로 걸어서 간호사실에 있는 체중계로 향했다. 입원해서 들어올 땐 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는데, 200미터 넘게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느낌과 명치 아래의 모든 근육이 소리를 지르는 느낌, 배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고통은 두통이었고, 그래도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체중계까지 가서 겨우 체중을 재고 나서는 온몸의 힘이 풀려버렸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나는 남편과 수간호사님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에 실려 침대로 돌아왔다.
수술 후 첫날 아침, 그 이후에 시작된 지난한 과정은 그것이 절대 일반적인 회복 과정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나의 어지러움증은 빈혈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수술 날 엄청나게 받았던 수혈량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낮은 수치였다. 섭취량 대비 배설량도 너무 적어서 수술 직후 오히려 체중이 너무 많이 불어난 상태였고, 내 주치의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꺼번에 생긴 셈이었다. 우선 빈혈 해결을 위한 수혈이 시작되었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 것도 힘든 컨디션이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다시 소변줄을 하자고 하셨지만, 조금 정신이 들자 다시 소변줄을 꽂고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게 느껴져서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리고 수혈 지옥이 시작되었다. 나는 단순히 적혈구만 모자란 것이 아니라 혈액 응고인자가 모두 함께 모자란 상태였는데, 이 상태의 나쁜 점은 혈관이 매우 쉽게 망가진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수혈을 하려면 튼튼한 혈관에 꽂힌 굵은 바늘이 필요했다. 이 비극은 내 양팔과 발의 혈관을 다 건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몇 번의 주사를 맞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수혈을 하다 혈관이 망가지고, 새로운 혈관을 잡기를 계속 반복했고 양팔이 학대를 당한 사람처럼 완전히 멍투성이가 되었다. 그렇게 수혈과 수액을 맞으면서도 나는 제대로 화장실을 가지 못했고, 저녁에 되자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되어 소변줄을 다시 하겠다고 말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결정도 나와 담당 간호사에게 힘든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출산 전에 비해 5-6배는 가깝게 부은 나의 하반신에 소변줄을 꽂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좀 더 연차가 높은 간호사가 들어와서 소변줄을 한 번에 꽂고, 망가진 혈관주사 부위를 살피더니 퉁퉁 부은 다른 손에 수혈을 이어나갈 수 있게 새로 주사부위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적혈구에 이어 혈장 수혈까지 하고 있는데 분만장에서 초음파를 보자는 연락이 왔다.
아무리 수술 중에 출혈이 많았다지만 수혈을 하고도 오르지 않는 빈혈 수치는 설명되지 않는다며 분만장으로 나를 부른 사람은 산과 담당 교수님이었다. 수술 부위 드레싱을 뜯고 복부 초음파를 자세히 보시던 교수님은 전공의 선생님들과 한참을 보시다가 내게 복벽 내에 피가 고이고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수술 후에 복벽 위까지 피가 찬 것인데, 다행히 자궁 내에는 추가 출혈이 보이지 않고 복벽 내에 고인 피도 계속해서 피가 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고인 피의 양이 2리터 가까이 되어 보인다며 추가 출혈 없이 흡수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해주셨다. 고여있는 피를 빼기 위해서는 재개복을 하는 방법과 카테터를 넣는 방법이 있지만 두 방법 모두 지금의 내 컨디션에서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억지로 피를 빼기보다는 주변 근육과 조직에 흡수되도록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셨다. 대신 지금보다 하반신에 멍이 더 들 수 있고, 낫는 과정에서 조직이 딱딱해지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병실로 돌아와서도 오르지 않는 빈혈 수치 때문에 적혈구를 추가로 수혈했는데, 수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상한 증상이 생기고 말았다.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발진이 시작되었고, 열감이 오르는가 싶더니 온몸이 덜덜 떨려서 침대가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몸이 간지러울 때는 나도 모르게 몸과 옷이 닿는 부분들을 긁고 말았는데, 무통주사를 달고 있는 상태임을 망각한 채 간지러운 감각에만 집중하다 보니 몸에 상처가 남을 정도로 긁으면서도 아픈 줄을 몰랐다. 이때 생긴 상처들은 수술부위 흉터처럼 오래 남아서 이 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었다. 아무튼 이렇다 보니 다시 담당 간호사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고, 수혈을 끝까지 하지 못한 채 알레르기 약을 맞고 회복을 기다려야 했다.
남들은 소변줄과 수액을 떼고 무통주사만 남긴 채 걷기 시작한다는 수술 다음날, 나는 복벽 내 추가 출혈과 수혈 부작용을 경험하며 또다시 괴롭기 짝이 없는 밤을 보냈다. 그렇게 열심히 수혈을 하는데도 오르지 않는 빈혈 수치 때문에 언제 CT를 찍게 될지 몰라서 또다시 금식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괜찮았지만, 다시 건조한 병실에서 1시간마다 입을 적시며 나와 남편은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렇게 수술 후 둘째 날이 밝아왔고, 이른 시간부터 혈액검사와 초음파를 추가로 보면서 다시 출혈이 생기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정말 다행히도 CT까지 찍을 필요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정상은커녕 타깃만큼도 오르지 않는 빈혈 때문에 추가 수혈이 결정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부작용을 고려해서 백혈구 제거된 혈액을 맞기로 했고, 수혈량도 하루 전보다는 줄어들었다. 보통 수술 후 둘째 날 수술 부위를 드레싱 하면서 페인버스터를 제거하는데, 나도 정해진 양이 거의 다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제거해야만 했다. 떼고 나서야 나는 페인버스터의 덕을 아주 많이 본 케이스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페인버스터는 보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추가 비용이 15만 원 발생했는데, 사람에 따라 효과를 거의 보지 못하고 약만 새는 케이스도 있다고 해서 수술 전날 꽤나 고민을 했던 약이었다. 제거를 하고 나니 수술 부위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제왕절개 후기에서 봤던 수술 부위가 불타는 느낌과 내장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점점 줄어드는 무통주사를 간절히 바라보면서 신나게 버튼을 누르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수술 당일과 다음날 너무 많은 고통을 한꺼번에 겪다 보니 이제는 소변줄을 빼는 것만으로도, 수혈을 1팩씩만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 아파도 추가 진통제를 더 맞을 정도인지 생각하다가 고통이 지나가버렸고, 남들처럼 많이 걷지는 못해도 화장실을 나 스스로 갈 수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게 되었다.
아직은 화장실을 갈 때도 부축이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같은 층 복도 맞은편에 위치한 신생아실에 면회를 가는 것도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아기를 낳았는데 안아보기는 커녕 실물을 제대로 보러 가기도 어려운 상태라는 것이 나를 조금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최악의 고통과 어려움을 지나 보내고 회복이 되기 시작하면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는 못하지만 복도라도 조금 걸으려고 애썼고, 이뇨제를 먹으면서 부기를 빨리 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내 몸이 어떻게 됐는지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코끼리처럼 부어오른 허벅지와 종아리, 누르면 다시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부어서 신발이 들어가지 않는 양발이 보였다. 양쪽 허리부터 배꼽 아래로는 모두 멍이었고, 허벅지 안쪽과 발까지 멍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 시트와 입고 있던 옷은 어젯밤 수혈 중 새버린 혈액과 수액, 내 땀으로 더 이상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 상태 때문에 곁을 떠나지 못했던 남편도 문명과 담을 쌓은 사람처럼 수염이 자라 있었고, 씻지 못해서 더욱 피곤해 보였다. 나는 먼저 남편을 보호자 샤워실로 보냈고, 침대 시트를 갈아달라고 요청하고 새 옷을 가져왔다. 남편이 돌아와서 천천히 내 몸을 물티슈와 수건으로 닦아주었고, 그때 처음으로 온몸의 멍과 상처를 확인하고 피부에 바를 크림을 처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처방과 처치를 기다리기만 하던 나는 적극적으로 회복에 힘쓰기 시작했다. 무통 주사를 여러 번 누르고 일어나 앉아있기도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창 밖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제야 느껴지는 부은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며 남편이 주물러주는 발과 다리의 감각을 느끼다가 피로에 지쳐 까무룩 잠이 들고, 통증에 다시 잠을 깨기를 반복하며 하루가 지나갔다. 몸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화장실을 자주 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부기가 빠지면서 수술 후에 오히려 3킬로 정도 늘었던 체중이 하루 만에 3킬로가 빠졌다.
원래 5박 6일로 예정되었던 입원 일정은 추가 출혈과 수혈 과정으로 인해 하루가 미뤄졌다. 교수님은 매일 와서 내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셨고, 정말 꼼꼼하게 수술을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출혈이 많아지면서 복벽 내에 피가 차게 되었고, 자궁 내 지혈이 잘 되고 꼼꼼하게 마무리를 했는데도 예상치 못하게 추가 출혈이 생기게 된 것에 대해 매번 다시 설명하셨다. 아무래도 내가 의료인인 것을 알고 있었고, 혹시나 의료사고를 의심할까 봐 더 그러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수술 내내 교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고,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히려 수술 다음 날 다른 교수님이었다면 이렇게 빨리 원인을 발견하고 처치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수술 전에 출혈이 많을 것임을 알고 지정헌혈을 미리 받아두지 않았더라면 수혈이 늦어져서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수술 후 3일째에도 신생아실 면회를 겨우 갈 만큼 어렵게 걷고, 복도에 나와서 빠르게 회복하는 다른 산모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남들보다 어려운 수술을 겪었으니 당연하지, 생각하며 참으려고 했는데 새벽에 어렵게 일어나서 남편을 불러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코피가 터진 남편을 보자 나도 마음의 둑이 터져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온몸이 멍과 상처도 내가 의료인이니까 괜찮아, 하고 참고 늦게 회복되는 것도 의학적으로 판단하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왜 하필 나는 이렇게 회복이 늦을까, 아직까지도 이렇게 화장실 한 번 혼자 못 가고 모든 부분을 남편에게 의존해서 남편조차 지치게 만들었을까 싶어 너무 우울했다. 남편은 새벽에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나 때문에 잠이 완전히 깨서는 그저 건조해서 코피가 난 것뿐이라고, 자기는 정말 힘들지 않고 몸은 지금 회복하는 중이니까 조바심을 내지 말라며 한참 동안 차분히 나를 달랬다.
그렇게 몸뿐 아니라 눈까지 부어서 맞이한 수술 후 4일째, 아껴두고 점점 버튼을 적게 누르던 무통 주사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담당 간호사는 무통주사 리필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많이 아프면 약을 리필할 것을 권유했지만, 교수님은 단호하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끊을 것을 권유하셨다. 나는 빨리 회복하고 싶은 욕심과 버틸 수 있다는 전날 새벽의 다짐을 생각하며 무통주사가 끝나자 모든 수액을 중단했다. 이제는 내가 먹는 양이 늘어나야만 회복이 빠를 것이라는 판단에 먹고 싶지 않아도 매번 나오는 미역국을 조금 더 뜨기 시작했다. 대형 병원에 입원한 장점을 발휘하여 다양한 카페와 식당에서 평소에 좋아하던 음료나 간식, 좋아하던 죽 종류를 남편이 사다 주었고 밥을 많이 못 먹으면 남편이 사 오는 다른 음식이라도 열심히 먹었다. 붓기는 하루에 2-3킬로씩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몸에 조금씩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혼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갈 수 있게 되었고, 이뇨제를 끊고도 몸무게가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긋지긋하던 섭취량/배설량 확인도 하지 않게 되었다. 무통 주사를 떼고 나자 배 전체가 명치까지 아파와서 먹는 진통제에 의존을 해야 했지만, 여기까지 회복하고 있는 것이 놀랍고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는 아기를 보러 힘들어도 걸어서 갈 수 있었고, 신생아실 유리 너머로 아기를 보고 있으면 아픈 것도 잊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곤 했다.
드디어 다가온 퇴원 전날, 아직도 천천히 회복되는 빈혈 수치 때문에 나는 혈관주사 하나를 빼지 못하고 달고 있었다. 이제는 퇴원하고 조리원에 갈 날이 다가오는데, 아기를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아기를 안아보려면 도움 없이 앉거나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복대를 꽉 조이고 이를 악물고 걷는 연습을 많이 했다. 퇴원 전날이 되자 이제는 배의 통증과 다른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빈혈 때문에 늦어졌던 몸이 회복되면서 초유가 차는 유방 울혈이 시작된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직접 유방을 마사지해주거나 적극적으로 이 통증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모유 수유를 위한 유방 마사지 교육 영상만 문자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영상을 봐도 손만 대도 아픈 유방을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간호사실에서 유축기를 빌려 유축을 시작했는데, 유축기를 켜고 끄는 방법만 알려줬을 뿐 유축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양쪽을 5분씩, 마사지 모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핫팩을 대고 유튜브를 통해 학습한 남편이 마사지를 하고 유축을 20분씩 해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꼭 한 번은 아기를 안아보고 싶어서, 의미 없을 정도로 적은 모유를 들고 신생아실로 가서 아기를 안아보고 싶다고 말씀드려서 잠시나마 아기와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유리 너머로, 사진으로만 보다가 내가 낳은 따끈한 아기를 처음으로 품에 안고 태명을 부르자, 아기가 눈을 뜨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뱃속에서부터 듣던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눈을 뜨는 아기를 한참을 안고, 사진을 찍으며 신생아실에서 다시 데려갈 때까지 짧은 순간을 함께했다. 퇴원 전날 밤새 아픈 배와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잠시 안았던 나의 아기를 생각하며 고통을 잊으려 노력하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 되었고, 아침에 드디어 모든 주사를 뺀 뒤 나는 자유로운 두 손으로 세수를 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추위에 방전되어버린 차에 시동을 거느라 한참을 밖에서 고생을 했다. 나는 이제야 스스로 손이 닿는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고, 몸의 상처부위에 연고를 바른 후 입원할 때 가져왔던 외출복을 입었다. 남편이 퇴원 수속을 마치고 와서는 입원 기간 동안 수혈만 17팩을 했더라고 알려주었다. 나와 나의 이름이 붙은 아기의 퇴원 수속을 마치고 바구니 카시트를 들고 내 환자 팔찌를 끊으러 간호사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일주일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앓느라 얼굴과 몸은 엉망인데도, 카시트에 곱게 실린 아기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이제야 나도 아기도 건강하게 살아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위험한 수술을 했고, 조금 늦은 회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목숨을 걸고 아기를 만나게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산모들에게도 출산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생각하든 예상 밖의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예상을 벗어난 사건이 산모의 건강에 직결되기도 한다. 그렇게 내 모든 것을 걸고 만난 아기가 생각보다 예쁘지 않으면 어쩌나, 내게 모성애가 처음부터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 목숨을 걸고 만난 나의 아기는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태어난 날은 나를 닮은 것도 같고, 하루하루 지나면서 남편을 닮은 것도 같은 나의 아기는 병원에서 신생아나 미숙아를 그렇게 많이 봐온 나에게 또 다른 느낌을 줄만큼 예쁘기만 했다. 신생아실에 면회를 가도 다른 아기들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 아기만 보이고 예쁜 점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저 작은 아기일 뿐일 텐데, 나와 남편의 좋은 점만 닮은 것 같은 예쁜 아기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우는 모습도, 자는 모습도, 내가 부르면 눈을 떠서 나를 보려는 그 모습도 계속 더 보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퇴원할 때 곤히 잠든 아기를 조심조심 들고 차에 태운 우리는 처음으로 세 식구가 된 것을 실감했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도, 아기가 깰까 봐 소곤소곤 말을 하고, 음악도 틀지 않은 채 조용하게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조리원으로 향했다. 남편은 운전병 출신인데, 군대에 있을 때 사단장님을 태웠던 이후로 가장 조심해서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잠든 아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나도 금방 곯아떨어지고 말았는데, 조용하게 뒷자리에서 함께 자는 나와 아기 때문에 남편은 행복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나는 고통과 통곡의 병원을 뒤로하고 편안한 집 근처의 익숙한 도로와 건물이 보이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던 것 같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남편과 나 사이에도 많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만 세 식구가 된 우리의 첫 느낌은 평화와 행복이었다. 비록 새로운 가족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더라도 곤히 자는 아기의 얼굴을 보며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아기, 랑이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