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과연 끼인 샌드위치일까?

둘째에 대한 고정관념

by 행파 마르죠

나는 둘째로 태어났다.

둘째에 대한 고정관념은? 끼인 자이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 끼인 자가 나이다. 부모님은 언니는 첫째라서 첫째에 대한 기대치와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동생에게는 막내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대하셨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의문점을 풀어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언니는 바른생활 그 자체였다. 반면에 독설의 대가였고 자존심도 세서 살짝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가면 두배 세 배로 나를 물어뜯곤 했다.


그 절정의 시기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였다. 바른생활 언니는 집. 도서관의 일정한 루틴을 지키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술.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고 동아리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대학 들어가자마자 그림동아리에 가입해서 그 동아리를 아지트 삼아 눌러앉아 그림만 그렸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술. 담배를 지독히 한다. 그림 그린다고 한 잔, 누구 생일이라고 한 잔, 비 온다고 한 잔, 그림이 안 그려진다고 한 잔, 술 마시는 이유는 지어내면 그만이었다. 물론 나는 술 모임의 열렬한 멤버였고 맨 정신으로 있는 시간보다 술에 절어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그림동아리에 애착을 가지고 활동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그림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싶었지만 독불장군인 아버지와 모범생 언니의 반대 앞에서 아무 힘도 못 쓰고 그들이 바라는 영어영문학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하고 말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전공을 했으니 당연히 흥미가 없었고, 학교 젤 끝, 폭풍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인문학부까지 올라가는 게 버겁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아마추어 화가회 전시회를 위해 동아리에 틀어박혀 밤새 그림 그리다 새벽 버스 타고 집에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그림을 핑계로 중간에 술을 마시고 어울리는 시간도 많았다.


모범생이었던 언니는 이런 내가 못마땅하고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맨날 술이나 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전공 공부는 뒷전인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곤 했다. 새벽에 들어온 나에게 욕하고 어떨 때는 내 앞에서 문이 부서져라 문을 쾅 닫고 한 달 동안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말 한마디도 안 걸었다. 그런 언니가 미워 나의 이유 있는 반항은 커져만 갔고 술 마시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언니에게는 내가 부모님 말 안 듣는 못된 망아지였다.


이제까지 쓴 글은 순전히 내 관점과 기억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울 아버지는 고향에서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판단하시고 언니는 할머니께 맡기고 나와 동생만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셨다. 당시 언니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중이었고 나와 동생은 미취학 상태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언니는 맘 속 깊이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새 터전을 잡고 땅을 일귀야 하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언니의 학교생활을 온전히 케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고 할머니 댁에 맡기셨을 것이다.


하지만 초등생인 언니한테는 부모님한테 버려졌다는 상처와 아픔이 가슴에 새겨졌다. 언니는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불우이웃 성금과 학용품을 일절 받지 않았다. 동정받는 시선이 너무 싫었던 거다.


만약 내가 언니였다면? 부모님의 그늘이 없는 곳에서 아무리 할머니가 잘 대해주셨다 해도 마음의 구멍을 메우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귤 과수원 일구는 부모님이 너무 바빠 동생을 돌보지 못해 내가 동생을 돌봐야 해서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우리 동네에 학교가 없어 옆 동네까지 수 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그것도 혼저서 다녔다. 난 혼자 걷는 걸 즐겼다. 여름이면 수없이 많은 귤 과수원들을 지나면서 귤꽃 향기를 맡고, 가을이 되어 귤이 노랗게 익을 때쯤이면 귤 감별사가 되어 맛있게 보이는 귤들을 하나하나 따서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드러낸 귤 과육을 입에 넣고 또 넣고 맛을 음미하곤 했다. 가을마다 1킬로 넘게 이어진 코스모스 길을 지나며, 고무신을 벗어 꽃에 앉아 있는 벌들을 낚아채서 빙 빙 돌리며 기절시킨 후 벌의 꽁지를 빨아먹었다.


세상의 온 천지가 내 놀이터였다. 냇가에서 개구리 잡고, 돌을 밀어내 지네를 맨손으로 잡아 동네 슈퍼에서 엿을 바꾸어 먹었다. 밤이 되면 집에 기어 들어 거 엄마의 숨결을 느끼며 잠이 들았다. 내가 부모님 밑에서 평화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언니는 부모님 없는 '설움'과 상처를 겪었다.


내가 아닌 '언니'의 관점에서 글을 쓰면서 나는 둘째라서 결코 끼인 샌드위치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사랑받은 자였다. 부모님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으시고 데리고 다니셨다.


둘째라서 사랑받지 못했다는 건 어느 한 부분만을 바라보고 내 멋대로 판단해 버린 '왜곡'이었다.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나'와 '부모님'에 대한 왜곡과 오해가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언니를 이해하고 나니 유달리 내게 못되게 굴었던 언니에게 먼저 손 내밀고 그냥 안아주고 싶다.


글쓰기는 이렇게 좋은 것이다.


글을 쓰면서 오해가 저절로 풀리고 나와 내 가족들과 화해하게 된다.


난 이미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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