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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의미

무서운 아버지의 진짜 모습

by 행파 마르죠

울 아버지의 생신은 8월 초이시다


생신 한 달 전부터 뭘 전해 드릴까? 뭘 해야지 좋아하실까? 백만 번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 계신다. 5년 전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입원과 퇴원을 수십 번

반복하셨다. 마지막 자존심인 대소변도 못

가리셨다. 폐암 수술하시고 밥그릇 들 힘도 없으신 엄마가 돌보기엔 힘들거라 판단하고, 가족회의를 거쳐 요양병원에 보냈다.


제주도에 계신 데다 코로나 이후 아버지를 방문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7월부터 방문시간 예약제로 전환해, ' 비대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으로 10분 정도

면회가 가능해졌다. 휴가 날짜를 받고 제주도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해 면회시간을 잡았다.


날짜가 정해지니 또 생일 선물이 고민이 되었다. 음식을 못 드시니 맛난 걸 해 드릴 수도 없고 병원에 온종일 누워 계시니

물리적인 선물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냥 내 목소리를 들려주자.'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무의식 깊은 어딘가에 가족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믿는다.


병원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 생일이신데, 오늘이 마지막 생일일지도 모르니 생일 축하 노래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2시쯤 교대하는 돌봄이 분 폰번을 알려줄 테니, 전화해 보라고 했다. 원래 규정에는 어긋난다는 말도 이어서 강조했다.


마침 목요일이라 영어교습소 수업이 없는 날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온 우주의 좋은 기가 내 주변으로 모이나 보다. 알람 시간을 맞춰 놓고

두 시 5분에 전화를 걸었다. ( 교대시간이라 바쁠지도 모른다는 내 계산에서 5분 지나서 전화함)

'


폰 번호 미리 저정해 두고 어떤 성향의 분인지 미리 알아 두었다. 푸근한 목소리의 중년 아주머니였다.

"안녕하세요? ~씨 둘째 딸 ~인데요?"

"아, 네. 잠깐만요."

어려운 결정 내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전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버지께 생일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니, 오히려 이게 뭔 상황인가 당황하셨을 거다. 돌봄이 아주머니께서 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보채는 목소리만 들렸다.


나는 괜찮다고'했다. 표현은 안 해도 마음으로 다 알고 계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내 몸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진한 피와 딸 에너지가 전달되었으리라 믿었다.


막상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대체 뭐 간디

여태 못하고 살았을까? 언어의 힘이 마음과 까지 파고들고 몸 온도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내 무의식 속에, 아버지는 무섭고 엄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릴 때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벌 벌 떨면서 아버지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모 건강센터의 뇌 치료 프로그램에서 어릴 석 사랑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적어보는 시간이 있었다. 과거 소환을 하면서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올랐다.

중 3 때 부반장을 했는데, 학부모 회의 소집이 있어서 바쁘신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가 오셨다. 학부모 회의에 참가하셔서 그 당시의 촌지(돈봉투) 개념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딸을 통해 촌지를 보내라는 얘기를 들으셨다. 뭐 그따위 선생님이 있냐고 화내실 줄 알았는데 공부 잘하는 똑똑한 딸 덕에 이런 데도 와 보네 하고 좋다고 허 허 웃으셨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아버지는 엄마들 사이에서 유일한 청일점 학부모로서 그 날 모임을 주관하시고

인기를 한 몸에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당시의 집안 사정에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액수를 봉투에 담으시고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오히려 내가 학부모를 호구로 알고 비열한 짓을 한 담임선생님을 고발하고 싶었다.


두 번째 사건~

휴가차 온 가족이 모인 자리였다. 울 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둘째 오빠가 술에 취해 다짜고짜 나에게 똑바로 살라고 했다. 순간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에 내가 똑바로 안 산 게 뭐가 있냐고 말대답을 했다. 오빠는 이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말대답하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까지 몸이 성하셨던 아버지는 왜 가만히 있는 동생한테 그러냐고 내 편을 들어주셨다. 나로 인한 싸움이 크게 번져 고성이 오가고 물건이 날아다니고 다른 가족들은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왜 오빠한테 말대답해서 싸움이 일어나게 하냐고 온 가족 특히, 언니로부터 잔소리와 쓴 말들을 들어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가려져서, 아버지는 약한 내편이 되어주신 유일한 가족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는 티브이로 권투시합을 즐겨 보셨다. 오빠들은 유지에서 대학들을 다니니 아버진 아들들 대신 나를 옆에 앉히시고 스포츠 캐스터보다 더 열을 내시며 내게 생중계를 하셨다. 라이트 래프트 훅 어퍼 컷

이런 권투 용어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버지는 내가 딸인 걸 잊으셨던 게 틀림없다.


자연과 사물에 한 관찰력이 좋으셔서 그림도 잘 그리셨다. 내가 그 재능을 이어받은 유일한 자식이다. 노래 듣는 걸 좋아하셨다. 라디오에 테이프를 틀어놓고 하루 종일 들으셨다. 특히 이 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좋아하셨다. 하도 많이 들어서 나는 가사를 다 외웠다.


중학교 입학해서 영어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어찌나 무섭게 가르치시는지 조금이라도 못 따라가면 사정없이 등짝을 내려치셨다. 대학교 제2 외국어 전공으로 일어를 택했는데 ,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 큰 딸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아버지 몰래 책장에서 일어책을 치워 버린 다음에야 부녀 레슨은 끝이 났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주변에서 딸까지 대학을 보내냐고 하셨다. 아버지는 굽히지 않으시고 딸 셋 모두 대학을 보내셨다. 그 당시에는 이 모든 호사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누린 것들에 당연한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의미 있는 과거 소환을 하면서 아버지는 날 엄청 사랑하셨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사랑 표현에 약하셨을 뿐이다.

아버지의 진짜 모습은 사랑이셨다.


휴가 둘째 날에 요양원을 방문했다. 유리문 뒤의 아버지는 돌봄이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앙상한 뼈를 드러내시고 간신히 침대에 지탱해 앉아 계셨다. 눈을 감으셨다 떴다를 반복하시며 입을 꾹 다무시고 한 마디도 안 하셨다. 동생과 나는 우리 존재를 알리려고 손짓 발짓 미소짓 다 해가며 큰 소리로 말을 했지만 묵묵 대답이었다.


나는 안다. 나와 동생의 말들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릴 적 소환을 하면서 아버지의 참 사랑을 알게 된 것처럼, 아버지는 당신이 평생 사랑해 왔던 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다 담고 계시리라는 걸 나는 안다.


집으로 와서 아버지가 즐겨 들으셨던 목포의 눈물을 연습하고 녹음해 두었던 파일을 돌봄이 아주머니한테 보내 드렸다. 그리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말하고 나니 오그러 드는 게 덜했다. 좀 오그러 들면 어떤가? 나중에 이 한마디를 못해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버지는 내 노래를 들으시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노래 참 좋다고 하셨단다.


그래도 괜찮다. 어느 순간 그게 당신이 사랑하는 둘째 딸이란 걸 아실 때가 오시리라 믿는다.


이 글을 쓰먼서 우주만큼 큰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 사랑으로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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