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아름답다니
나도 이런 표현을 쓸 줄 몰랐다.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폭군, 독불장군, 안하무인,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고집쟁이 등등인 줄 알았다.
내 고향은 제주도이다. 젊은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어서 나왔던 내 고향 제주도 땅을 추석을 맞아 오랫만에 밟았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친정식구들이 다 모였으니 바닷바람이나 쐬러 가자며 드라이브를 나왔다. 이동중 차 안에서의 화제는 당연히 식구들, 특히 몸져 누워계신 아버지였다.
막내오빠와 나는 여섯살 차이이다. 딱히 오빠와의 어린 시절은 생각나는 게 없지만, 날 업어 키윘다고 한다. 오빠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보니 새삼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느꼈다고도 한다.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존재감을 깨달은 것이다. 과수원에 얽힌 어린시절 증언이 시작되었다.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숨죽여 들었다.
때는 오빠가 초 5학년 때였다. 나는 당시 6살이었으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시 아버지는 대정읍 신도리라는 촌구석에서 태어나고 자란 집안의 장손이었다. 평범한 농사꾼 생활에
진력이 난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고향 논밭을 다 팔아치웠다. 서귀포에서 귤 과수원을 할 야무진 계획을 잡고 어머니와 어린 5남매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과수원 터로 쓸 토지 1,500평을 사들였다. 원래 귤 과수원 자리가 아니라 소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많은 소나무들을 다 베어 과수원을 일군다는 야무진 꿈을 품으셨다. 소나무밭을 구입하는데 전 재산을 다 써버렸으니 일꾼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고, 쌩판 모르는 낯선 곳에 갔으니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숙하지만 3년 터울의 세 아들들(나에게는 오빠)이 있었다. 큰 아들 고2, 둘째아들 중2, 막내 아들 초5. 이제 그들은 소나무밭을 귤 과수원으로 바꿀 거대한 아버지의 플랜에 동원되었다.
1,500평이면 소나무가 대체 몇 그루였을까?적어도 수 백 그루, 아니 천 그루도 넘었을 텐데 ...
그리고 베어진 그 나무들을 어떻게 옮기고 처리했을까? 다행히도 건축 업자들이 베어진 소나무들을 구입해 갔다고 한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서 귤나무 묘목들을 하나 하나 다 심었다. 첫번째로 막내오빠가 삽을 떠서 파내고, 둘째 오빠가 그 아래로 삽을 떠서 파내고 큰 오빠가 마지막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아버지가 귤나무 묘목을 심었다. 나름대로 전략을 짜서 그 광활하고 척박한 땅을 일구었다.
이런 작업을 자그마치 1년 반에 걸쳐서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번 그리고 봄 가을이 한 번 더 돌아오는 세월이다. 시간이 아닌 세월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는가?
봄이 되면 봄 햇빛에 그을리고 여름이 되면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다 나무를 다 베어버려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겨울이면 제주도 특유의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묘목을 옮기고 삽질하느라 손가락과 온 몸의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팠으리라. 한 달도 두달도 아닌 1년 반을 그렇게 하셨다니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는 몰랐다. 등하교 길마다 귤꽃 향을 풍기며 코를 간지럽혔던 감성의 귤나무 하나 하나에 아버지의 의지와 피와 땀과 근육통이 서려 있었다는 걸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