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예술가 기질이 다분했다. 가끔 그림을 그리셨는데 소. 닭,개 등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을 소재로 삼아 그리셨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뚝딱 뚝딱 잘도 그리셨다. 관찰력, 디테일과 색감 등 그림에 대한 감과 촉이 좋으셨다.
나도 그림을 곧잘 그렸다. 중 1 미술시간에. 자화상을 그렸는데 미술 선생님이 칭찬을 하셨다. 그 날로 미술부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받으면 미술 점수에 플러스되어 나는 항상 100점이 초과되는 이상한 미술점수를 받았다.
내가 중 3때 집안이 망했다. 안 그래도 사춘기를 앓고 있는 내게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그림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난 조두목이 되었다. 미술부 부장이 된 내게 남학생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내가 고 1입학 후, 학교 낙성식 (초대학교에서 하는 일종의 완공 준공식)에 아버지가 오셨다. 어머니는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셔서 늘 바쁘셨다. 우리 학교의 상징은 천마였다. 하늘을 나는 말~
아버지는 천마를 보시더니 한마디 툭 던지셨다.
" 말이 저리 뚱뚱해서 하늘을 날겠나?천마의 기상이 안 보여." 아버지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나름 이름있는 미술 조소작가에 의해 제작되었을 천마상을 딱 보시고, 예리하게 캐치해 내셨다.
나의 방황은 고등학교 내내 이어졌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나는 나대로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대학 다니는 오빠들과 언니 등록금 대느라 안 그래도 빠듯한 집안 사정이 더 안 좋아졌다. 다른 친구들 다 가는 경주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나는 왜 서울 오빠들에게는 큰 돈을 보내면서 수학여행은 안 보내 주냐며 만만한 엄마께 발악했다.
수업을 빼먹고 미술실에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야간지습은 아예 할 생각조차 안 했다. 시험전에 대충 벼락치기해도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신생학교여서 대외적으로 입상하는 걸 중요시했다. 난 학교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학교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셨고 지각하거나 야자를 빼먹어도 그냥 눈감아 주셨다.
아버지는 라디오 테입으로 늘 뽕짝을 들으셨다. 이 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특히 좋아하셨다. 난 귀에 못이 박히도롴 들어 가사를 다 외울 정도였다. 나 미의 빙글빙글이란 노래가 유행했을 때였다. 뜬금없이 아버지는 노래를 불러주신다며 나와 동생 앞에서 나미의 빙글빙글을 부르시며 방을 빙글빙글 도셨다. 아버진 끼쟁이셨다.
그림을 좋아하던 아버진 서점에서 세계의 유명 박물관 그림책을 사 오셔서 곁에 두고 늘 읽으셨다. 나를 옆에 앉히시고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 전시된 그림을 보여 주셨다.
아버진 그림과 예술을 사랑하신 진정한 예술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