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G Sep 06. 2024

환갑 넘은 세 자매의 난생처음 호캉스


'럭셔리'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각자가 경험한 세상에 따라 그 사람의 눈높이가 달라진다. 아랍의 석유 부자가 누리는 럭셔리와 나의 럭셔리 수준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명품 가방의 브랜드를 재깍 알아차리는 눈치도 없고, 한 끼에 몇 십만 원 하는 밥보다 행주산성 7천 원 국수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나지만 가끔은 분수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무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호사를 누리고 나면 왕이 된 듯 기분이 좋을 듯 싶어도 실은 슬픈 감정이 밀려온다. 엄마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만난 엄마 또래의 사모님들은 딱 봐도 고급 진 옷을 입고 행동 하나하나에 여유가 묻어 난다. 음식을 먹으면서 비쌀까 봐 종종 대지도 않고, 서비스하는 직원에게 과도하게 미안해 하지도 않는다. 내가 그곳에서 보는 삶의 모습과 엄마의 삶이 겹쳐지면, 괜스레 울적해지고야 만다.

엄마에게 '럭셔리'란 정육 도매점에서 먹는 소고기, 10만 원 주고 샀다는 시장표 옷, 동네 친구 분들과 떠난 패키지 단체 해외여행.... 기껏해야 그 정도다. 가끔 자녀인 우리가 좋은 식당, 좋은 선물을 할라치면, 펄쩍 뛰면서 자식 주머니 걱정부터 앞서는 게 우리 엄마다.

출처:오마이뉴스 


엄마는 경북 의성이라는 작은 산촌 마을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그 유명한'K-장녀'인 셈이다). 그 시절, '살림 밑천'이라고도 불리던 맏딸 답게, 엄마는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그 돈으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건사했다. 다행인 것은 엄마의 여동생들, 두 이모가 그런 엄마의 희생을 고마워하고 지금까지도 잘 챙긴다는 것이다.


관절염으로 힘들 때 같이 병원을 동반한 것도, 농번기마다 같이 과실을 따겠다고 팔을 걷고 나선 것도 모두 두 이모들이었다. 어찌나 우애가 깊은지 자매 없는 사람 서러워 못 살겠다고 내가 대놓고 말할 정도다. "우리 언니 고생하니까", "우리 언니 힘드니까"가 입에 배어있다.


올여름, 엄마의 여름 휴가를 챙긴 것도 이모들이었다. 남들 다 간다는 피서 한 번 못 간 엄마가 안타까웠는지 세 자매는 함께하는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시기는 지난 8월 중순, 장소는 울산이었다.


세 자매는 울산, 영천, 대구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최근 큰 이모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한동안 만남이 뜸했었다. 몸이 좋지 않은 큰 이모를 위해 큰 이모집이 있는 울산으로 휴가 장소를 정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딱히 해 줄 게 떠오르지 않아 다 같이 식사나 하시게 용돈을 보내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내 얘길 들은 남편은 다른 의견을 냈다.


"돈 드리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이모님과 어머님이 절대 본인 돈 내고는 안 하실 것 같은 걸 선물하면 어때?"

"그게 뭔데?"

"음... 예를 들면, 호캉스(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것)?"

"에이, 무슨... 멀쩡한 집 놔두고 그런 곳에 돈 쓰는 거 다들 싫어하셔!"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싫어하실 것 같다고. 남편이 대꾸했다.


"이모님 몸도 안 좋으신데, 집으로 가면 더 힘들지. 세 자매가 오붓하게 쉬면서 얘기 나누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내가 찾아볼게."


휴가날 걸려온 전화, 쨍쨍한 목소리에 긴장했는데


몇 번이나 말렸지만, 남편은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호텔 예약 확정 문자를 보내주었다. 4성급 신상 호텔에다, 바다가 코 앞이고 전 객실이 씨뷰(seaview, 바다 뷰)라는 점을 강조했다. 가격 역시 서울에 비하면 싼 편이었다.


나는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이모에게 전달했다. 역시나, 이모는 예상대로였다.


"야야, 느그가 무슨 돈이 있다꼬! 멀쩡한 집 놔두고 호텔이 뭐꼬? 당장 취소해라."

"이모님, 취소가 안 돼요. 안 가시면, 돈 그냥 날리는 거예요."


남편과 한참을 전화로 실랑이 한 끝에 이모도 결국 OK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환갑을 넘긴, 그것도 호텔 이용이 익숙지 않은 세 자매가 체크인을 할 수 있느냐였다. 급히 이모 딸인 사촌 동생에게 연락했다. 사정을 안 사촌 동생은, '그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네요'라며 자기가 전부 알아서 하겠다고 우릴 안심 시켰다.


휴가 당일. 나는 조금 걱정이 됐다. 아끼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엄마인데, 돈 낭비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엄마의 못마땅한 말투가 벌써 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체크 인 시간이 지나고 얼마 후, 전화벨이 울렸다. 괜히 긴장이 됐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 쨍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지야! 우린 진짜 몰랐데이. 큰 이모가 말을 안 해줘가. 밥 묵고 어디 좀 가자 캐가 따라왔더니, 우릴 호텔로 끌고 와서 깜짝 놀랐다 아이가. 세상에 세상에, 바다도 이래 보이고... 욕조도 있고... 어머 어머 어머...."


작은 이모의 소란스러움에 이어 엄마의 뭉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고, 백 서방은 이런 대가 있는지 와보지도 않고 우에 알고 예약했노. 세상에... 희안테이...."


깔깔 대는 웃음소리에 이어 다음은 큰 이모였다.


"하하하, 영지야, 내가 느그 엄마랑 작은 이모한테 서프라이즈~ 했다. 백 서방이 다 준비한 곳이라고... 다들 와 저카노? 우하하하 영지야 고맙데이, 여기 너~~ 무 좋다. 이야~ 우리가 느그 덕분에 이래 호강한다! 우리 조카, 조카사위 최고다!"


세 자매의 시끌벅적함이 귀를 아프게 할 정도였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사촌 동생이 너무 웃긴다며 계속해서 사진을 보내주었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셋이 나란히 누워서 웃는 모습, 작은 이모가 준비한 커플 옷을 입고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바다 뷰를 배경으로 폼 잡은 모습...


사진 속에 세 여자는 할머니가 아닌 영락없는 철부지 어린 소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찡해졌다.

호캉스, 이까짓 게 뭐라고... 하루에 몇 백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도 아닌데... 이런 작은 이벤트에도 감동하며 기뻐하는 엄마와 이모들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마 엄마에겐 이 호캉스가 평생을 통 털어 가장 럭셔리한 여름휴가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수화기 너머가 더 시끄러워졌다. 조식뷔페 덕분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호텔에 아침까지 잘 차리놨대. 진수성찬이더라. 잘 먹었대이."


큰 이모에 이어 작은 이모가 전화를 뺏어 또 말한다.


"영지야, 호캉스가 이래 좋은 거가? 밥도 안 해도 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가 바다도 실컷 보고, 다들 와 그래 호캉스 호캉스 하나 했디마는, 이유가 있네! 너무 좋다! 조식도 너무 맛있드라."


엄마가 또 전화를 뺏어 말한다.


"야야, 백 서방 돈 많이 썼제? 느그 이번 달 괜찮겠나? 괜히 돈 쓰게 한 것 같아서 미안테이..."



엄마는 또 돈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엄마! 그런 걱정일랑 말고 이모들이랑 신나게 즐기셔!"


딸인 나는 엄마의 세상을 좀 더 넓혀주고 싶다. 엄마가 아는 좋은 것보다 더 좋은 세상도 어딘가엔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평생 햇볕에 그을리며 종일 노동 해서 번 돈을 꼬깃 꼬깃 숨겨뒀다가 손주들에게 다 내어주는 그런 세상 말고, 좀 더 화려하고, 편리하고, 편안한 그런 세상. 돈 앞에 눈치 보거나 종종 거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가끔은 내 기분과 취향에 아낌없이 투자해도 괜찮은 그런 세상.


엄마는 앞으로 얼마나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그런 세상을 선물할 수 있을까?


편집: 오마이뉴스 


작가의 이전글 '선재앓이'에 잠 못 드는 나, 남편이 결국 폭발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