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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Nov 10. 2020

작가가 글쓰기에 겁 먹었을 때...


‘하아...’ 작고 낮은 한숨이 쉬어졌다. 괜히 아무도 없는 거실을 어정거려 보았다. 냉장고도 한 번 열어 봤다가 먼지 없는 바닥도 한 번 쓸어 보았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 본 행동들이었지만 영 효과가 없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떡하지?... 난 저렇게 못 쓸 것 같은데... ’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대낮에 흉기를 든 강도처럼 찾아들었다.


이 모든 게 그녀 때문이다. 이슬아.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자 불행이다. 글을 읽는 동안 너무 행복하지만 읽고 나면 글을 쓸 수가 없다. 달뜨는 느낌으로 땅으로 꺼져버리는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슬아를 알게 된 것은 어느 책에 나온 구절 때문이었다. 요즘 시대엔 이슬아와 김애란 작가의 글만 팔린다고 했다. ‘팔리는 글이라...’ 김애란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슬아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꼭 소주 이름 같네’ 라며 그녀의 책을 찾아보았다. 나 역시 팔리는 책의 저자가 되고 싶으므로 사전 답사인 셈이다. 이슬아는 한 달에 만원 구독료를 내면 매일 한 편씩 독자들에게 글을 보내는 신개념 메일링 서비스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그렇게 수년 간 메일로 보낸 글을 엮은 책, ‘일간 이슬아’는 백과사전보다 두꺼웠다. 포켓북도 안 읽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나는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책장을 열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책장을 펼치고 난 후 나는 종종, 자주, 틈틈이,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라는 마음으로.  


종국엔 그 두꺼운 일간 이슬아를 아껴 보느라 아침에 두 편, 저녁에 두 편으로 편수를 정해놓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ㄴ픽션에 푹 빠져들었다.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묻는 독자들에게 그녀의 애인 하마 씨가 그랬다지. 그냥 ㄴ픽션이라고 얼머무리라고... 픽션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그녀의 ㄴ픽션에 나는 진실 코 매번 감동했다.  

일간 이슬아 포스터,  사진 = 이슬아 인스타그램


나는 작가들과 자주 사랑에 빠진다. 미끈한 문장과 섬세한 표현, 묘한 스타일을 가진 작가들의 글을 보면 나는 어느새 세상 쉬운 여자가 돼 있다. 게다가 양다리 삼다리 까지 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너무 좋아서 가슴에 꼭 껴안기도 하고, 떠벌리기도 하고, 그 사람을 염탐하기도 한다. 실체가 분명 존재 하지만 나와는 닿을 수 없는 사람들... 유부녀인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낀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됐을까? 왜 이토록 그녀를 응원하고 싶을까? 단순히 그녀의 나른한 글들이 좋아서 일까? 그녀가 속살까지 드러내며 해 준 이야기가 멋져 보여서였을까?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나는 식탁에 턱을 괴고 생각해 보았다. 왜지? 왜지? 왜이지?  


그녀는 내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어느 과거의 나를 자꾸만 생각나게 했다. 그녀와 같은 꿈을 꾸었던 과거의 나... 용기 있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고, 과감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했고, 잘하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했고, 과감하지 못했다.


다 잊고 생긴 대로 살고 있던 아줌마의 묵은 때 같은 욕망이 쇠수세미 같은 그녀의 글이 박박 긁어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읽을 때마다, 그녀의 행보를 볼 때마다 자꾸자꾸 응원하고 흥하길 기도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이에겐 질투가 아닌 경외가 드는 법이니까.


그녀에 비하면 내 재능이 너무 희미하다. 그녀의 책에 이런 말이 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 똑같은 원고지인데도 그 아이가 쓴 것만 유독 빛이 나는 원고지가 있다고. 그것이 바로 재능이라고.


아무래도 나는 그 빛나는 원고지 밑에서 조금은 꾸깃한 모습을 하고 있는 원고지일 것이다. 그 얘기만 보면 좌절의 늪 직행일 것 같지만 그녀는 뒤에 이 얘길 덧붙인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쓰지는 않았다...(중략)
얼마나 평범하든 비범하든 결국 계속 쓰는 아이만이 작가가 될테니까...


나 역시 계속 써온 사람이고, 계속 써나갈 사람이다. '일간 조G'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순 없겠지만, 아무도 청탁하지 않은 글을 매일 조금씩 써나가고 있는 것은 그녀나 나나 똑같다.  


 ‘이게 맞나?’ ‘이게 맞을까?’ 하는 자기 검열의 시간마다 결정자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혼자만의 검열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어느 이가 다정하게 어깨를 꾹 누르며, “맞아, 잘했어 그렇게 하면 돼”라고 격려해준다면 다시 손가락을 '우두득우두득' 풀며 다시 키보드를 누를 수 있다.


나는 그 힘을 이슬아 작가에게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 될 수 없겠지만, 되고 싶었던 그 작가로부터. 글쓰기에 두려움을 준 것도 극복을 준 것도 모두 그녀다. 그러니, 아니 고마울 수 있겠는가, 아니 좋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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