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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May 24. 2020

착한 사람은 성공할 수 있을까

2018년 어느 날 퇴근길에.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둘 때 내 사수는 케이크에 숫자 1 모양의 초를 꽂아서 노래까지 불러주며 첫 마음 잊지 말고 잘되든 못되든 꼭 연락하라고 편안한 이별을 만들어 주셨다. 끌어안고 눈물의 이별 신을 한지도 벌써 12년. 잘되면 좋은 술 사서 찾아가기로 했는데. 한편, 몇 년 전 마지막 직장의 상무님은 내가 그만들 때 공부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많이 하려고 하냐며, 출국 2주 전까지 사표 수리를 해주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이별을 겪으면서 알게 된 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내 인품을 지켜내는 것이 교양이며 이것은 학식과 비례하지 않는 차원의 문제라는 것. 믿을 만한 직원, 따를 수 있는 선배, 좋은 친구, 그리고 착한 딸. 어느 것 하나 가벼운 이름이 없어서, 그리고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렇게 작은 사회가 이해와 고집과 자존심으로 이렇게 괴로울 수 있어서, 든든했던 그때 사수가 계속 생각난다. 어제부터 느낀 건데 우리 파트너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클라이언트랑 바리스터 (barrister -법정 변호사)한테는 천사 나셨더라고. 서류 쿡쿡 찍으면서 오분마다 방에서 나와서 you need to speed up 하던 사람 어디 갔어. 수습변호사는 또 이러면 위축되어 쭈글쭈글해져서 덤비지도 않으니까. 쯧.


일하면서 만나는 인연들을 돌아보면, 예쁘고 못생긴 것과 상관없이 사람을 끄는 이들이 있다. 도화살도 사실 사람 끄는 힘이 아닌가. 공정한 사회라는 곳에서도 사람의 일이라 성공의 한 끗은 직관적 호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회사에 다니면서 인상적인 경험은, top management로의 보고가 내가 죽어라 써준 보고서보다는 주로 말로 이뤄지고 (그리고 되게 짧고), 사장님이 카운터파트에게 보내는 이메일은 거의 항상 간단명료하고 때로는 너무 간단해서 이게 내가 지난 두 달간 매달린 일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인간적인 대화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한 달 동안 현지 실사 출장을 다녀와서 120장짜리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내고는 매니지먼트 마인드로 -시간 아껴드리려고- 보고용 파워포인트 5장에 요약 보고서 워드 한 장으로 만들었더니, 사장님은 그것마저도 쓰지 않고, 오너에게 두 문단짜리 이메일과 5분 대면 보고로 결정을 짓더라. 일하며 만난 관계가 웃긴게 돈 계산 뒤에는 결국 악수해야 하고, 마진 때문에 새벽에 머리 터지게 싸우다가도 또 다음에도 같이 그 징글징글한 회사랑 같이 일하게 되고, 또 더러는 골프도 같이 치고 애들끼리 술먹다 부르는 친구도 되니,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인 것 같다.

잘되는 사람들은 보통은 잘 웃는 사람들이고 보통은 진실한 사람들이 좋은 웃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자존심이 세서 곤란한 질문은 열심히 피하고 덮으려고 애쓰곤 했는데, 늦은 공부를 하면서 이런 자존심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잘 못 친 시험은 잘 못 쳤다고, 어려운 건 어렵다고, 질투가 나서 미치겠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해주고, 마음에서 털어내려고 노력한다. 안 그러면 내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는다.

과도한 경쟁은 정말 사람을 추악하게 만드는가, 추악한 성향의 사람들이 경쟁에 특화되어 있는가. 2년 가까이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슬프고 안타깝게도 인간적인 매력은 빵점일 때가 많다. 독하거나 이기적이거나 가식적이거나 멍청함. 어쩔 땐 보. 이럴 땐 거울을 들고 나를 한번 봐야겠지. 그 집단의 거울은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은 학창 시절 내내, 직장생활 내내 귀감의 대상이었는데 사실 이런 목표를 추앙하는 사회 분위기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과연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그 보람과 행복감이 사실 상대적 성과에서 비롯된 우월감이 조금은 섞여있는 것이 아닌지. 잊기도 전에 하나씩 나오는 일련의 분노조절장애 성향의 사건들을 보며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행복이 애를 멱살잡이 해서 목표 성취형 인간으로 만든다고 쟁취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생각하게 된다.


바리스터를 만나고 파트너는 집에 보내고 걸어오면 십삼 분, 차로는 삼 분 거리의 사무실에 걸어오기에 번들과 랩탑이 너무 무거워서 블랙캡을 타며 사느라 바빠 안 본 지 오래된 친구들 얼굴이 지나간다. 초고속 승진해서 삼십 중반에 탑 쓰리까지 갔는데 괜히 직원들 먹으라고 비치해놓는 간식 없애서 욕먹다가 사람 관리하는 수업 듣는 친구. 코너 오피스도 가졌는데 힘들다고 격주로 열한 시 반에 울면서 퇴근길에 전화하는 스타트업 차린 친구. 회사에서 보이차 티테이블도 코너 사무실에 놔줄 정도로 잘 나가는 홍콩 뱅커지만 고객한테 SPC이름을 몇십 개 (spc naming을 많이들 알파벳에 숫자로 순서대로 쭉 매기기 때문에 좀 헷갈릴 수 있다) 헷갈려서 자괴감 느꼈더니, 엄마가 부질없다, 회사 그만두래서 고민하는 친구. 


세련된 삼십 대도 뒤로는 그늘이 있다. 난 앞도 뒤도 후지지만. 패셔너블하게 두건을 두르고 와이드 팬츠를 입은 오늘 본 여자 바리스터와 치렁치렁 예쁜 스카프를 두른 우리 회사의 여자 파트너의 뒤에도 가끔은 쭈글쭈글하고 후진 면이 숨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기 좀 덜 죽게. 인간성 좋은 웃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당당한 포장을 씌우는 건 많은 수련이 필요한 일이다.

밤에 찍은 사진은 왜 다 흔들리나 내 마음처럼.

세인트폴 성당 옥상은 비오는 테이트모던 카페의 큰 창가와 함께 런던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 두 개 중 하나인데 퇴근길에 약속 때문에 센트럴 라인을 타려고 좀 걷다 보니 성당에 둥근달이 걸려있다. 어젠 열 시 반 오늘은 여덟 시 퇴근. 회사 다닐 때도 자정 넘어 컨퍼런스 콜 했으니 새로울 건 없는데,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오는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 아침에 사간 라지 라떼 한잔을 넣은 게 하루 종일 먹은 거 전부다. 세상 참 공짜가 없네 싶다. 이 회사 다니면 나 진짜 다이어트 성공한다. 이 추세라면 70살쯤에는 경로당 미녀 등극 가능! 집에 돌아와 폰을 열어보니

우리가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든 거 아냐?

하는 이미 답할 시간을 놓친 대학 친구의 메시지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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