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다녀왔다. 폭염경보가 발령되었고 끈적하게 녹은 엿이 온몸에 늘어 붙는 것 같은 날씨였다. 풀베기 작업은 여느 해보다 더 힘들었다. 윙윙거리는 소음, 덜덜 떨리는 손, 예초기 매연 냄새, 칼날에 자주 감기는 풀. 끝마치고 그늘에 앉아서 한참을 쉬었는데도 쏟아지는 땀은 그칠 줄 몰랐다. 숨 막히는 45도 사우나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내 온몸은 물에 퐁당 빠진 것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흠뻑 젖고 말았다.
오는 길에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고 식당에 들렀다. 거두절미 먼저 씻고 싶었다. 화장실을 바삐 찾아가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아빠 고추 잡아줄까?”
순간 나는 뭔가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어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아빠와 아들이 있었다. 아빠는 소변기 앞에 서서 볼일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 네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애가 맑은 눈망울을 한 채 아빠를 빼꼼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기이함과 당혹감이 찾아들었다.
예전에 소방훈련을 갔던 적이 있었다. 소방관이 운동장 한가운데 나무에 불을 붙이고 소방호스로 진화를 하는 훈련이었다. 두 명씩 조를 짜고 한 사람이 물을 틀면 다른 한 명은 호스의 끝단을 잡고 불을 끄는 것이었다. 대기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신호를 보내자 한 명이 소화전에 물을 틀었다. 고압의 물이 차오르면서 납작하던 호스가 동그랗게 팽창했다. 묵직한 수압이 순식간에 긴 호스를 차고 나갔다. 호스 끝단을 잡고 있던 실습생이 마개를 돌렸다. 순간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수압으로 기우뚱 중심을 잃었다. 그는 호스를 제대로 부여잡으려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이리저리 춤추는 듯 헤매었다. 덕분에 뒤쪽에 앉아 있던 우리들에게 물세례가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나 여기저기 달아났다.
꼬마애의 그 한마디에 순간 그 옛 기억이 소환되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쏟아지는 오줌 줄기, 주도권을 쥔 꼬마,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화장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나.
“괜찮아. 아빠가 할 수 있어. 안 도와줘도 돼. 고마워.” 나의 망상과 불안을 깬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한 톤으로 곧 이어진 아빠의 대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이상한’ 의도는 그렇게 제지되었다. 현실에서는 종종 무책임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만화 같은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기도 하니 어쩌면 나의 불안은 합리적 의심쯤 될 것이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거울을 바라보니 소변기에 용변을 보는 아빠 옆에 서서 아쉬운 듯, 신기한 듯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해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화장실을 나서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빠에게 도발적으로 그렇게 얘기한 건 그 아이가 오줌을 눌 때 옷을 버리지 않도록 그의 부모가 평소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이란 것을. 그렇기에 아이도 아빠를 그처럼 도와주고 싶었다는 것을. 아! 이 얼마나 기특한 생각이란 말인가.
오래전 나랑 같이 근무했던 박 선배에게는 전립샘 비대증을 앓고 있던 80대 장인이 있었다. 처갓집은 자택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어느 날 급한 연락이 왔다. 소변을 볼 수 없으니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는 요청이었다. 도착해 보니 장인의 얼굴은 고통으로 창백하게 일그러진 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차에 급히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가느다란 고무호스로 된 카테터를 요도에 삽입하여 터지기 일보직전의 방광 속 소변을 배출시켰다. 그제야 장인의 얼굴도 화색이 돌면서 편안해졌다. 몇 차례 그런 일이 더 있고 나자 박 선배는 소변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병원을 찾을 수 없어 카테터 삽입 요령을 익혔다고 했다. 이후 급한 연락이 오면 장인어른의 용변을 자신이 직접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장인에게 ‘해우소'가 아닌, ‘해우사위’였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택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90%를 훌쩍 넘는 사람들은 그런 바람과는 달리 병원 아니면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젠가 사건 뉴스를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내가 늙어서 아프게 되면 시설은 절대 안 돼. 알았지? 난 집에서 죽을 거야!”
미국 의사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요양원에 입소한 어느 할머니의 한마디가 생선가시처럼 오래 걸렸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 같아.” 현대의학은 생명의 연장에만 관심이 있지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유지한 채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가완디는 이야기했다.
나이 들어 부모가 병들게 되었을 때 자녀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라면 대부분 병원이나 요양원 등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인들도 자신의 정든 집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인생의 막바지를 쓸쓸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터이다. 아직까지 희망과 현실의 간극은 그렇게 멀다.
산속에 할아버지를 버리고 돌아오던 중 함께 버렸던 지게를 챙겨서 지고 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도 나중에 아버지를 그렇게 버리려면 필요해서라고 답했다던 고대 설화 속 아들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우리들은 노인들이 편찮으면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그 이외의 대안은 돌아보지 않는다. 지옥 같은 삶이라도 살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래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는 노인들의 마지막 여정의 행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러 현실적인 장애가 많기는 하지만 집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시스템 마련을 위한 법적, 제도적, 경제적인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시급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외롭게 숨을 거두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판 미필적 고려장이 아닐까.
병원이나 요양시설, 혹은 일부 부유층을 위한 실버타운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으로 혼자 생활이 불가능한 노인들이 그들 각자의 집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선진국에서처럼 보편화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까지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사람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당연한 바람이고 권리이기 때문이다. 먼 앞날의 일인 것 같지만 곧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닥칠 조만간의 일이기에, 재택 간병이나 재택 돌봄 시스템은 자식으로서의 도리이고 미래의 나를 위한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아빠를 도와주려던 그 아이는 커서 ‘해우사위’ 박 선배처럼 자신의 부모님을 보살펴 줄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신의 용변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아빠를 그렇게 도와주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을 마지막까지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말로는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아도 막상 책임을 결행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약속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틀릴 수도 있다며 발뺌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몇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는 무언가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세일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벌초하고 성묘도 하면서 정작 살아 있는 부모의 마지막 소원을 어떻게 지켜드릴지 생각이나 해보았냐”라고, “어려워도 힘들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배려하고 행동하려는 그 진심이 바로 사랑이고 책임”이라고 까무룩히 더운 추석 명절날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조그만 입으로 그것도 당차게 내게 일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