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면 책을 읽는다. 짧은 시간에 읽어야 하기에 주로 시집을 선택한다. 책을 접고 휴지를 당겼다. 그런데 마지막 자락이 그만 툭하고 끊겼다. 종이로 된 원통형의 휴지심만 남은 것이었다. 휴지걸이에서 옷이 모두 벗겨져 버린 녀석을 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집은 다 읽어도 고이 보관하는데 휴지심은 왜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 버리는가? 같은 종이로 만들어졌고 화장실에 놓여 있었으며 각기 제 역할을 하던 것들이었다. 더구나 실생활의 쓰임새로 봐서는 휴지심이 더 유용했는데도 말이다. 차이점은 바로 의미다. 시집은 그 문자의 세계가 나에게 전해주는 의미들이 있다. 하지만 휴지심은 단순한 기능만을 수행했을 뿐, 그 역할이 다하자 쓸모를 잃어버렸다.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 존재감을 상실하고 까맣게 잊혀 있던 것들에게도 감춰진 의미를 떠올리는 아침이었다. 감겨있던 휴지가 모두 벗겨지고 알몸뚱이가 드러나서야 인식되는 물건. 세상의 온갖 대상과 일, 그리고 관계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자리를 비우거나 없어지고 사라졌을 때 그제야 발견되는 가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나를 받치고 위로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그런 숨겨진 의미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서울에서 큰 이모가 잠시 우리 집에 찾아왔다. 허리까지 치렁하게 내려오는 파마머리, 씩씩한 걸음걸이, 적은 말수에 웃으면 활짝 드러나는 하얀 치아, 하지만 수묵화의 먹빛처럼 우수가 스며 있는 낯빛. 저녁이 되어도 대기는 끈적이며 무척 더웠다. 이모는 돗자리 하나와 가벼운 이불 그리고 베개를 챙기더니 옥상으로 올라갔다. 슬래브 지붕 위에서 잠을 자려는 것이었다. 과년한 사돈처녀가 혼자 옥상에서 잠을 잔다고 하니 할머니는 뜯어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이모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갈대로 엮은 돗자리 위에 어린 형제들은 이모와 나란히 누웠다. 한낮에 달궈진 지붕의 콘크리트 열기가 마치 온돌처럼 따뜻했지만 하늘에는 얼음꽃 같은 별들이 총총했다. 길게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도 빙수처럼 보였다. 70년대 말 마산의 도심에는 차량이 드물어서 공기가 맑았고 가로등이나 보안등은 물론이고 근처에 간판도 없었기에 시골처럼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야간에 통행금지도 있었고 등화관제 훈련도 종종 벌어져서 불빛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면서 ”불 꺼" 하고 외치던 시절이었다. 달도 없는 밤이면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덕분에 별은 실컷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얘들아, 저길 봐. 북두칠성이야. 큰곰자리라고도 하지. 국자같이 생겼어. 찾기 쉽지? 하늘을 보고 누운 이모가 가늘고 매끈한 손가락을 뻗어 지휘하듯 허공을 짚으며 말했다. 저기 북극성을 봐. 이모가 팔을 하늘로 뻗으며 말했다. 우리가 별자리를 쉬 찾지 못해 애태우자 말했다. 내 손 끝을 봐. 우리는 이모 곁에 바싹 붙어서 머리를 이모가 들어 올린 오른팔에 붙였다. 서로 밀고 당기다가 외쳤다. 아! 보인다. 보여. 이모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는 저 별자리를 보며 나그네들이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었대. 막내 동생이 물었다. 저 별 따라가면 서울에서 이모를 만날 수도 있는 거야? 이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얘들아, 이모 내년에 호주로 이민 가.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이 일제히 물었다. 이모, 호주는 어디에 있어? 남쪽. 지구 반대편에 있어. 나도 데려가줘. 같이 가면 안돼? 엄마 말 잘 듣고 씩씩하게 크면 그때 데리러 올게. 다음날 이른 아침,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 이모는 이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우리들에게 카드 엽서를 보내 안부를 전하곤 했다. 북극성도, 작은곰자리, 큰곰자리도 볼 수 없는 남반구의 그곳에서 말이다.
얼마 전 호주에 살고 있는 이모에게서 엽서가 왔다. 10여 년 전 한국을 방문하고 난 이후의 첫 연락이었다. 우크라이나계 호주인 남편 빅터와 함께 우리나라를 찾았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 데 세월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 버렸다. 살이 찌고 거구였던 이모부는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노부부는 렌터카로 전국의 유명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특히 이순신 장군 유적지는 거의 빠짐없이 찾았다고 했다. 남해 보리암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며 명량해전의 발생연도와 장소를 정확히 말하는 푸른 눈의 그를 보면서 나는 놀랐고 또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빅터는 성격이 부드럽고 미소가 많았으며 이모에게 특히 자상했다. 며칠 우리 집에 머물다 떠날 때 정이 많이 들어서였을까 포옹을 하며 헤어졌던 기억이 난다. 엽서에서 이모는 빅터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다. 지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왜 좀 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행간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고독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모가 먼 타향에서 홀로 감수해야 할 일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추스르고 상실의 아픔도 잊혀갈 즈음, 한국에서의 여행이 기억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함께했던 조카들에게도 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것이다. 버튼만 누르면 세상 어디든 통화가 가능한데 굳이 펜으로 꾹꾹 눌러쓴 아날로그 엽서, 일주일씩이나 걸리는 우편으로 소식을 전한 이모. 안방에서 무료로, 그것도 즉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이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흔하디 흔한 핸드폰 번호도 알려주지 않은 구시대 유물 같은 이모.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모는 엽서에 여러 번 예수님을 믿으라고 적어 놓았고 마지막에도 그 말로 마무리를 했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전화번호는 남기지 않았다. 혹시 내가 놓쳤나 싶어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지만 전화번호는 없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번호를 알려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화기가 필요 없는 천국에서 만나자는 것인지 이모의 진의는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휴지가 툭 끊어지고 휴지심만 남은 것처럼 이모의 삶에서 빅터는 그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빛을 발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물러서서 배경이 되어 준 사람. 미움과 권태의 고개를 넘을 때 떠나지 않고 항상 곁에 머물러 준 사람. 조용히 웃으며 이모의 일상이 잘 굴러갈 수 있게 든든히 받쳐주고 버텨주고 위로를 건네준 사람. 나는 엽서를 읽고 먹먹해져서 그의 명복과 이모의 행복을 가만히 빌었다.
노자는 <도덕경> 11장에서 수레바퀴의 바큇살이 모이는 가운데는 비어 있기에 그 쓰임을 다하고, 그릇이나 방도 텅 비어 있어서 그 효용을 다한다고 말한다. 존재하고 드러나는 ‘있음’에게 이득을 주는 것은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없음’이라는 것이다. 휴지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텅 비어 있기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휴지걸이에 끼워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비어 있기에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음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려는 ‘루프양자중력이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우주가 끝이 서로 말려있고 그 빈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들었다. 마치 휴지심 비슷하게.
사람도 휴지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나 둘 뽑아 쓰는 고급 갑티슈, 물에 잘 풀어지는 값이 싼 두루마리 휴지, 지갑처럼 비닐 안쪽에 차곡차곡 담겨 주유소에서 서비스로 주는 휴지, 식당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 휴지, 모양과 재능 성격 환경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 고유의 특질, 영혼의 모양을 찾으려고 양파 껍질 벗기듯 빼고 빼고 또 빼서 들여다본들 기대와는 달리 특별한 무언가는 발견할 수 없다. 결국 마지막에는 텅 빈 상자나 휴지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스타플레이어가 마음껏 기량을 펼치게 하는 스타디움처럼,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고 혼종 되어 새로운 창조물이 솟아나는 멜팅팟처럼 사람의 영혼이 춤추고 제련되고 용솟음치는 그곳은 기대와 달리 텅 비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현대 뇌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아직도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낼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의 생각구조를 흉내 낸 인공지능의 기작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리라. 사람의 인식 상자 가운데는 휴지심처럼 비어 있기에 그 작용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은하수별처럼 각양각색으로 반짝이는 것은 빈 공간, 그 무용(無用)의 용(用)이 작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 안이 휴지심처럼 비어 있다고 해서 허무한 것도 무상한 것도 아니고 기쁘거나 슬플 일도 아니다. 외려 그 쓸모 때문에 무한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뭔가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뻑뻑하고 덜그럭 거린다면 욕심부리고 조급해하고 남들 따라 하느라 비워야 할 곳을 쓸데없이 가득 채우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또한 사람을 도구로 여기면서 아무 효용 없다고 비하하는 안팎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지니.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휴지심이다. 밀어주고 도와주고 받쳐주는 존재들 그래서 나도 당신도 충분히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