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고 머리칼은 흩날리네

소설

by 힉엣눙크

미친 듯 바람이 분다. 갈대가 운다. 하얀 갈대가 쓰러질 듯 누웠다가 다시 일어난다. 바람 속에 서걱이며 서럽게 울던 갈대. 푸르던 잎새는 갈색으로, 갈색이 다시 흰색으로 바뀌었다. 갈대는 제 속을 아무런 미련도 어떠한 회한도 남김없이 바람을 불꽃 삼아 하얗게 태워버린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러기들이 끼룩이며 낮게 날아간다. 주남저수지를 찾아든 새들. 그중에 어떤 무리가 동네 감나무 과수원에 내려앉아 쉬려는가보다. 모래 위로 하얗게 밀려왔다가 쓸려가는 그 비릿한 포말과 소리, 바닷가 파도처럼, 기러기들은 올 겨울에도 다시 날아와서 나의 감성을 적신다.


고등학생 시절,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내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다짜고짜 내 어깨를 때리면서 말했다. “야! 그 애가 내려온대!” 친구는 펜팔을 했었는데 몇 달간 사연을 주고받으며 내게 자랑삼아 떠벌리곤 했다. 서울에 사는 동년배 여학생이었다. 자신의 고민과 느낌과 감정을 잘 풀어내던 친구였기에 허물없이 친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내 친구를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정말? 우아, 좋겠네.” 그러자 친구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말이야, 한 명이 더 온대.” 내 친구는 막상 펜팔을 하던 상대를 직접 만나려니 설레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짝을 맞춰야 하니 나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와 나는 낯선 손님들을 맞이하러 마산역으로 갔다. 2월의 찬바람은 역 광장에 휘몰아쳤고 우리는 추위에 어금니를 부딪히며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추위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단발머리에 진홍색 목도리를 한 여학생이 보이자 친구가 말했다. “야! 저 앤 거 같아!”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은 미리 약속을 했던 것이다. 친구는 쓰고 있던 파란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두 여학생이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친구가 말했다. “맞죠?” 그러자 단발머리 여학생이 대답했다. “네!” 그때 옆에 서 있던 긴 머리카락의 그 소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을 연신 귀 뒤로 쓸어내리며 미소 짓던 그 모습.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첫 모습이다.


인근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만났지만 어색하지 않은 만남. 숙맥이던 나를 자꾸, 오래 말하도록 만들던 긴 머리 그녀의 질문과 눈빛.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친구의 펜팔 상대는 친척이 마산 문화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틀을 묵기로 했다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오전에 창동 빵집에서 만났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내 친구와 펜팔 친구는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친구가 화장실을 가자 분위기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 강아지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펜팔 친구의 친구, 긴 머리의 그녀가 말했다. 슬쩍 지나친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다시 물었던 것이다. 강아지의 사연이 정말 궁금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더 궁금해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유람선에 올랐다. 퉁퉁거리는 엔진소리와 스피커에서 울리는 트로트 노랫소리. 끈적한 소금기를 머금은 찬바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우리는 작은 이야기에도 크게 웃었다. 10여 분 짧디 짧은 바다 여행은 곧 마산항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돝섬에 도착하고서야 끝이 났다. 유원지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곳. 놀이기구와 동물원과 둘레길이 있던 그곳. 우리는 매달린 그네가 빙빙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탔고 사자와 북극곰을 보고 둘레길을 돌았다.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앞서 걸어가는 내 친구와 펜팔 친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나와 긴 머리 그녀. 겨울 해풍에 쏴아하며 울어대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아직도 땅이 약간 도는 것처럼 느껴져. 그녀가 말했다. 조금 친해져서였을까 우리는 말을 편하게 놓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내가 사이다 한 병 사다 줄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정말 좋아.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아. 넌 좋겠다. 바다 가까이 살아서. 쉽게 자주 볼 수 있으니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예전엔 엄마를 따라 어시장에 들르면 바다를 자연스레 볼 수 있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바다와 멀어졌어. 그런데 어쩌다 바다가 나를 부르는 때가 있지. 그녀가 물었다. 언제? 내가 대답했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혹은 이른 아침. 깊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을 때야. 조금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돼. 나 항상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해. 슬프고 외로울 때면 날 찾아와. 텅 빈 네 가슴을 먹먹하게 채워줄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돝섬을 떠나 다시 마산으로 돌아온 우리는 극장으로 향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였다. 당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는데 펜팔 그녀가 보고 싶다고 우겨서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상영시간이 임박해서였는지 입석 밖에는 없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영화를 서서도 봤다. 동그란 황금색 단추가 박힌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암막 커튼을 젖히니 스크린에는 벌써 영화사의 로고가 떠오르고 있었다. 좌석 옆 복도에도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왼쪽 빈 벽에 기대서서 영화를 보았다. 한겨울에 보는 아프리카의 대자연.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존 베리의 아름다운 음악이 서로 어우러지는 대향연. 우리는 넋을 놓고 혼곤히 젖어들었다.


오래 서 있다 보니 다리는 물론이고 허리도 아팠다. 자세를 바꾸다가 긴 머리 그녀와 손이 닿았다. 나는 슬쩍 피했다. 그런데 조금 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다가와 내 손에 닿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맥박 소리가 극장 안에 울릴 듯이 요란했다. 무슨 용기였을까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가늘고 매끈한 그녀의 손가락과 손등 그리고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오롯이 느껴졌다. 내 맘은 수증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처럼 터질 듯이 내달렸고 영화의 줄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스크린 속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고 그 소리에 놀란 홍학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비행기와 나란히 날아가는 홍학의 무리. 그 황홀한 순간을 나와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으로 함께 했다.


겨울 찬 바람 속에 우리들은 다시 마산역에서 만났다. 찾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와 펜팔 친구는 역사에 서 있었다. 개찰구로 들어간 그녀가 휙 돌아서더니 벙어리장갑을 벗고 백지장처럼 하얗고 매끈한 손을 흔들었다. 나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기차는 떠났고 나와 친구는 오래 플랫폼에 서 있었다. 그 후 긴 머리칼의 소녀와 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군대를 가자 위문편지를 꼬박꼬박 보내주던 그녀. 어느 날 행정반 사병이 내게 면회를 알렸다. 누굴까 궁금해하며 찾아간 면회소.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외출을 허락받고 나와서 걷던 공원길. 벚꽃 잎 날리던 그곳에서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느다랗고 하얗던 그녀의 손. 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가깝다고 오해했고 멀다고 착각했다. 감정에 서툴렀고 이해에 목말랐으며 욕망에 엇갈렸다.


수만 년의 세월을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는 철새들의 행로. 주남저수지는 가슴을 내어주고 눈물로 이별하며 물길은 더욱 깊어져서 드넓은 하늘을 오늘도 가득 담아내고 있다. 철새처럼 날아왔다 다시 떠나버린 그녀의 하얀 손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이를 씻기고 가족을 위해 저녁을 짓고 힘든 남편의 등을 토닥여주고 쇠락해진 부모님의 흰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있을까. 당신의 부드러운 손과 따스한 눈길. 세상의 모든 손과 눈은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인 것을.


바람이 몹시 부는 날, 기차역 광장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들판의 갈대는 어지러이 흩날린다. 새들도 힘에 부치는지 밀리듯 하늘을 난다. 오늘 같이 미친 듯 바람이 부는 날, 아프리카 호수에서 홍학 무리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 영화의 한 장면이, 그녀의 부드럽고 순수하고 하얀 손가락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고.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다고 저 새들이 그녀의 소식을 가만히 전해주어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