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도착하고 창문의 커튼을 젖혔을 때 자그마한 놀이터가 내려다보였다. 그곳에는 백인, 흑인, 아랍인 등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 10여 명이 뒤엉켜 놀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공을 차며 놀았고 여자아이들은 그네와 미끄럼틀을 탔다. 비좁은 놀이터에서 싸우기도 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사이좋게 어울렸다. 그런데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사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집에다 두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아서였을까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는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원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친구들, 교문을 나서면서 들여다보는 핸드폰, 텅 빈 놀이터. 익숙해진 우리네 풍경들이다. 우리가 어느샌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지금 스위스 아이들은 아직도 지니고 있었다. 밤 8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지만 우리의 오후처럼 환했다. 그제야 아이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흑인 소녀는 텅 빈 놀이터에서 공을 챙겨 들었다. 가냘픈 팔다리에 껑충한 키, 새카만 얼굴에 유난히 빛나는 흰자위. 마치 톰슨가젤처럼 낭창낭창한 발걸음으로 소녀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를 연극이 끝난 무대 마냥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와 낯선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새벽 2시였다. 달아난 잠은 다시 돌아올 줄 몰랐다.
다음날 루체른 시내에서 경사진 골목을 조금 오르니 바위 암벽과 그 앞에 제법 큼지막한 연못이 불쑥 드러났다. 바위에는 부러진 창에 옆구리를 찔린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사자의 표정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생생했다. 1792년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까지 루이 16세를 지킨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라고 한다. 대개 용병들은 목숨이 위급하면 도망가거나 고용주를 버리기 일쑤였다고 하는데 스위스인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무너지는 담벼락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지키는 신의와 용맹은 어찌 되었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빈사의 사자상’을 바라보면서, 작은 국토에 빈약한 자원, 여러 민족에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변방 국가 스위스가 오늘날 국민소득 9만 불을 이룩한 것은 어쩌면 알프스 험준한 환경에 뿌리내리며 체화한 순박과 우직 그리고 존중과 신뢰 때문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일행들과 식사를 함께했다. 아내와 나는 모녀 커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십 대 딸은 말수가 적고 얼굴이 창백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회사 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과 이를 벗어나고 싶어 불쑥 여행을 떠나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용한 전원생활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 등을 전해 들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들과 푸른 초원 그리고 수많은 호수들과 그림 같은 마을들. 산악열차를 타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들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던 미소는 오랜만에 깃든 행복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융프라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시 트레킹을 했다. 일행 중 우리와 저녁을 함께 했던 그 모녀 커플은 같이 가지 못했다. 딸이 고산병이 오는 바람에 트레킹은 포기하고 바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큰 기대 없이 들어선 오솔길이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아득하고 거대한 아이거 북벽을 등지고 내려올 때 발아래는 야생화 만발한 초원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불쑥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가슴이 뻥 뚫리면서 마치 꿈결을 걷는 듯했고 맑고 신선한 공기가 전하는 청량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경외감과 희열 그리고 행복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었다. 클라이네 샤이덱 역사 옆 레스토랑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아이거 북벽을 올려다보며 먹었던 퐁듀와 맥주 한 잔은 감동 가득한 마음에 화룡점정이 되었다.
로이커바트 온천마을에서 아내와 나는 자유시간을 선택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다가 도로변 화단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앳된 이십 대 초반의 여성 두 명과 중년의 남성 한 명이었다. 화단은 색감이 조화를 이루도록 식재되고 있었다. 남자에게 공무원인지 물었더니 자신은 조경회사 소속이며 커뮤니티와 계약하고 지역 내 정원이나 화단을 관리한다고 했다. 옆에 젊은 여성은 수습생이라 했다.
야외에서 하는 직업을 오히려 선호하며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는 풍토, 그리고 높은 보수와 안정된 일자리 덕분에 스위스에서 젊은 사람들은 굳이 대학을 가려하지 않는단다. 작업복 차림으로 흙을 만지고 꽃을 가꾸는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건강함을 느꼈다.
여행 마지막 저녁식사는 한국식당에서 했다. 들어설 때 한국인 식당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주인장을 보며 “한국말 잘하시네요.”하고 농담을 건네자 일행들은 모두 웃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내가 식당 주인에게 어떻게 스위스에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스위스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제법 길게 이어진 설명 끝에 그가 말했다.
“살기 좋은 곳입니다. 다 좋은데 단점이 있다면 한 가지... 지루해요.”
식당을 나설 때 아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 여기 이사 와서 살고 싶다.” 앞서가던 일행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지루하다잖아요.” 그때 옆에 있던 가이드가 덧붙였다. “유럽은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랍니다. 돈이 많으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래요.”
올해 초 유엔이 14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스위스는 9위, 우리나라는 52위를 차지했다. 경제규모 세계 10위 언저리를 차지하는 한국이지만 행복은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돈만 열심히 쫓다 보니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프스 지역의 모 생수처럼 스위스나 핀란드의 행복을 수입할 수는 없을까? 2002년 히딩크를 영입해서 4강 신화를 이룩한 월드컵처럼 세계 10위권에 걸맞은 행복을 우리 모두가 기적처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싼 돈 들여 먼 나라로 날아가 잠깐 맛보는 그 행복감 말고 말이다.
스위스 작은 놀이터의 흑인 소녀처럼 우리 아이들도 핸드폰이나 학원은 훌쩍 던져 버리고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청소년기 지옥 같은 입시와 좁은 취업 관문을 모두 통과했지만 번아웃이 되어 창백한 얼굴로 엄마와 함께 스위스행을 택한 직장 초년생 그녀도 팍팍한 미래 대신 일상에서 찾는 여유와 행복에 활짝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가이드가 말했다. “여권, 지갑, 가방, 중요한 거 혹시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그때 내가 대답했다. “챙겨야 할 중요한 하나가 빠졌습니다.” 가이드가 그게 무언지 되물었을 때 내가 말했다.
“마음이요.”
한증막 같은 더위가 기승이다. 이글대는 폭염과 끈적한 열대야 속에서 헐떡일 때면 서늘하던 스위스가 그립다. 하늘을 찌를 듯한 설산이 늘어서 있고 소와 양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는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호숫가 아름다운 마을과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마치 일상의 한편에 창문이 뚫려 있어 자꾸 그곳으로 눈길이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 한 귀퉁이를 그곳에 두고 왔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