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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훈 Jun 21. 2020

(다시) 시작하는 순간

#비포선셋

이야기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엔딩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엔딩이 있다. 주인공이 가진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환경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 곧 찾아올 거라는 확신을 주는 그런 엔딩.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은 이런 엔딩의 모범 사례다. 



전작 [비포 선라이즈]에서 하루 동안의 낭만적인 사랑을 나눴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는, 9년이 지난 [비포 선셋]에서 서로의 사랑을 추억으로 남겨둔 채 각자의 삶을 살아온 어른이 되어 재회한다. 아침이 오기 전까지 함께 비엔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전작처럼, 둘은 제시가 비행기에 타고 돌아가야 하는 저녁 전까지 함께 파리를 산책한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제시와 셀린의 대화는 그 후의 삶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9년 전보다 더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 이들에게 현재는 불만족스럽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제시와 셀린이 내비치는 인생에 대한 실망감의 기저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미련이 깔려있다. 


셀린의 집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는 앞선 대화들의 축소판과 같다. 제시는 셀린의 자작곡을 듣고 싶어 하고, 셀린은 제시의 요청에 응한다. 그리고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엔 직접적인 사랑의 표현은 없지만, 지금까지의 대화와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 맞물려 만드는 감정이 있다. 


제시와 셀린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블루스 가수 니나 시몬이다. 셀린은 관객을 '베이비'라 부르는 니나의 퍼포먼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니나 시몬의 된 듯 그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제시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마지막 대사가 나온다.


- 베이비, 이러다가 비행기 놓친다.

- 알아.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잡을 것인지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영화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니나 시몬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셀린이 보일 뿐이다. 춤은 계속되고, 화면은 서서히 페이드 아웃된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끝났지만,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지 우리는 안다.



- 2020.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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