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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백삼홈 Jan 20. 2022

5학년 수학 문제집이 비둘기 되어 날 던 날

아이 키우면서 문제집 허공을 향해 던져본 건 저만 그런 건가요?

 우리 집은 아파트 6층이다. 아침에 가끔 비둘기들이 베란다 실외기 거치대에 앉아 쉬었다 가곤 한다.

비둘기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 있다 햇살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훅 지나가는 걸 보면 비둘기의 힘 찬 날갯짓이다. 비둘기 날갯짓이 보이지 않지 않을만큼 눈은 아침부터 펑펑 내렸고, 하늘은 내 마음처럼 잔뜩 흐렸던 이 날이 사건의 시작이다.


4학년 겨울 방학 동안 '수학 공부 매일 한 시간' 평화 협정을 맺었다.

'수학 공부 매일 1시간 + 주말 게임시간 2시간 30분'

협상을 잘 못하는 아들이 제시한 2시간 15분 보다 무려 15분이나 보너스시간을 더해 주고 맺는 협상이었다. 4학년 게임시간보다 1시간이나 더 업그레이드 해준 우리가문에 길이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자기 주도 학습이라는 명분 하에 여러 과목을  1시간 동안 공부를 하는걸 어려워 하진 않지만, 수학만 한 시간 풀어본 적이 없다. 요즘 연습기간이다 생각하고 5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1시간 꼬박 수학집중시간'을 갖기로 했다. 1시간 30분 하는 영어학원에서도 잘한다고 하고, 학교에서도 집중을 잘한다 하니 보지 않고 믿어야 했던 엄마의 입장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 아이의 집중시간은 놀랍게 딱 20분이었다. 타이머를 맞추고 20분이 지나면 슬슬 집중력이 흩트러지기 시작한다. 초등학생은 적어도 40분은 집중한다는데 혼자 공부하려니 쉽지는 않겠다 싶은 생각에 어르고 달래며, 개학을 5일 앞두고 보름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사건의 주범은 속절 없이 펑펑내리는 눈

대설주의보 문자가 전 날부터 오기 시작하더니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와, 눈 내린다. 오늘 친구들하고 만나서 놀아야지~" 혼자 하는 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러게 눈이 많이 내린다. 오늘 소룡이(동생) 눈놀이해줘야 하는데 엄마가 오늘 코로나19 부스터 샷 맞는 날이라 못 놀아줘서 어쩌나.."

수학 문제집을 거실테이블로 가져 나와 타이머를 맞추고, 집중해서 공부를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한참 보이지 않아 화장실에 갔나 보니 침대 속에 숨어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공부하다 말고 뭐해?"

"어. 눈 오잖아. 이따 놀자고 내가 친구들에게 메시지 보냈어" 어라~이 당당함은 무엇이란 말이냐!

다시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는 집중력 제로상태를 보였다. 인심 쓰는 척 초콜릿 과자를 몇 개 주니

"아. 이제 머리가 잘 돌아가네 공부해야지" 하더니 이미 눈빛은 눈썰매,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친구 전화가 왔다. "나 지금 공부해서 못 나가 이따 다하고 전화할게" 지금 공부한다는 소리를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며 어이가 없어질 때쯤 계속 혼잣말, 딴짓, 하품 3종 셋트를 번걸아 해댄다.

결국, 내 안의 그녀가 등장했다.

"공부할 때는 집중해서 하라고 했지? 이것만 빨리 하고 나가서 놀아(분노 게이지 50이상 상승 중)"

"네." 입과 코가 북한산 자락까지 닿을 듯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두더니 읽지도 않고 책을 덮는다. 어김없이 그녀가 등장했다.

"너 이 문제 정말 몰라? 몰라서 별표 친 거야? 솔직히 말해"

 "어..... 어..... 어"

찰나의 순간! 5학년 수학 문제집이 허공을 향해 날아 비둘기 되어 날아 올랐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십계명에 있다면, 지옥행 티켓은 일등석은 무조건 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려면 공부고 뭐고 그만둬. 자세가 틀렸어"(background image 비둘기 날아오른다.)

그때부터는 랩퍼 아웃사이더 정도는 우습게 이길 만큼의 잔소리는 속사포 랩 처럼 흘러 나온다.

아이는 울고, 나도 울었다.

순간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너무 많이 내뱉었다. 주워 담고 싶었지만 이미 뱉어낸 말이었다.

며칠 전 가수 이적님의 인스타그램의 글을 보면서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다짐한 게 엊그제인 거 같은데 망각의 동물 중 최고인 나는 순간 모든걸 망각하고 말았다.


상처

초2 둘째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1학년 때의 인성교육시간 이야기를 들려준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다음엔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남아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해버리고 나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답니다. 그러니 친구한테는 나쁜 말을 하면 안 되겠죠?"

[이적의 단어들_이적 인스타그램}


아이에게 온갖 모진 말을 내뱉고, 다시는 공부하지 말라는 엄마는 마음에도 없고, 아이는 신나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우아한 척 유치함의 최고를 향해 내 달렸다.

'이제 공부 안 할 거니까 방에서 책 다 꺼내와서 문 앞에 둬, 재활용에 버리게'

'이제 공부도 안 하고 학교는 가고 싶으면 가고, 학원이랑 다 끊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사람마다 다 제 역할이 있는데 , 학생의 역할 중 하나가 공부였는데 이제 그거 안 하니까 네가 먹은 설거지, 옷은 다 네가 닦아서 먹고 입어'

'점심도 알아서 챙겨 먹어'(다 쓰려고 보니 유치 찬란함에 이만 줄임...)


점심시간이 되어 집에 혼자 있는  처럼 밥을 차려 먹고 치웠다. 아이는 컵라면을 끓여 점심을 때웠다. 마침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이전 일은 일어나지도 않덨던 아이처럼 너무나도 해맑게 " 금방 나갈게 조금만 기다려" 완전 무장을 하고 눈놀이를 나간다. 나가는 뒷모습에 화가나 집안을 어슬렁 거리다 베란다 창문 사이로 친구들하고 온몸으로 신나게 눈싸움하고 썰매 타는 아들과 친구들을 바라본다.

'애는 애구나. 또 저렇게 신나게 노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내 말을 조금은 잊었겠지 스스로 변명과 위로를 해본다.


저녁 식사 후 아빠는 특명을 내렸다. "당분간 공부하지 말자. 아빠는 요즘 고민이 많아. 공부 그게 뭐라고 그것 때문에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상황이 반복 되는 건 원치 않아. 정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고 그때 하자. 공부하지 않는 삶이 더 행복하다면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라는 솔로몬은 저리 가라의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셨다. 누가 보면 영재원 보내려고 하루에 몇 시간 억지로 공부시키는 부모줄 알겠다고 억울함이 밀려왔다. 부글부글 속에서 분노가 차오르며 그녀가 등장 할 때 쯤, 망각의 동물에서 인간으로 돌아와 이적님 생각이 나서 이쯤에서 멈췄다.


거짓말처럼 글 쓰는 이순간 비둘기가 우리 집 베란다에 앉았다. '부디, 오늘은 집안에서 비둘기는 날리지 말아 주세요' 하는 듯해 보인다.


아침 부터 어슬렁 어슬렁 할일없는 백수처럼 돌아다니는 아들이 보니 내안의 그녀의 등장 타임이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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